“금융인이지만 악취 해결에 앞장섰습니다”
“금융인이지만 악취 해결에 앞장섰습니다”
  • 서정훈 기자
  • 승인 2019.03.13 1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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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병교 전 세람저축은행장

삶이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출세는 했지만 성공과는 거리가 먼 경우를 자주 본다. 쉽게 말해 출세한 정치인은 있어도 성공한 정치인은 별로 없다. 반면에 출세는 하지 못했어도 성공을 일군 사람들을 만난다.

그래서 ‘출세가 곧 성공이다’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적 성공’과 ‘사회적 출세’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성공은 개인의 정신적, 정서적 상태를 기준으로 한 것이지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회적 성취 정도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은 긍정의 언어를 자주 사용한다. 일상생활에서도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는 단어를 잘 쓰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은 어려운 조건이나 환경에 처해도 열정을 쏟아 부어 성공을 일궈 주위에 감동과 아름다운 향기를 선사한다. 그러나 출세한 사람들은 긍정의 언어보다 부정의 언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상처를 주는 방법으로 자신의 목적을 쟁취해 겉으로는 박수를 받지만 속으로는 욕받이가 된다.

사람은 다양한 공동체에 속해 살아간다.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공동체를 비롯해 생계를 위한 일터공동체, 모임이나 취미생활을 함께하는 동호회, 거주나 일터가 있는 지역공동체, 나아가 태어나면서 주어진 민족(국가)공동체 등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속된 공동체 중 한 곳에서 만이라도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속한 모든 공동체에서 성공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선천적 장애와 항암치료를 받으며 성공하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 가족과 일터, 동호회, 지역사회에서 아름다운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성공의 주인공을 ‘피플 파워’에서 만났다. 금융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류병교 저축은행장이다.

만나자마자 들려온 첫 마디는 “20일 대구로 갑니다”이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경북에 소재한 저축은행장으로 위촉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류병교씨는 올해 64살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던 류병교씨는 줄곧 제2금융권인 상호신용금고와 저축은행에서 근무해왔다. 이천에서 임원으로 일하다 2002년 초 안산상호신용금고(현 Pepper 저축은행) 상무이사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안산과 인연을 맺게 됐다.

3년여를 근무하다 2005년에 서울 강남에 있는 푸른저축은행 상무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 급성 간염이 재발해 3년간 휴직을 했다가 2012년 안산에 있는 Pepper 저축은행 부사장으로 복직했다. 그러다가 2014년 세람저축은행 대표이사 겸 저축은행장이 되어 2017년 퇴임했다.

퇴임 후 2년을 부인이 하는 제과점에서 틈틈이 일을 돕다가 오는 20일 경상북도에 있는 저축은행장으로 위촉돼 다시 금융인으로 복직하는 것이다.

그는 금융인으로서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절 만찬에 초대되어 청와대를 다녀온 바 있다. 1999년 6월이다. 금융감독원이 45만 금융인 중 신지식인 6명을 선정했는데 제2금융권에서는 유일하게 그가 선정됐다.

당시만 해도 저축은행들이 주먹구구식 경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선진화된 일본 은행들의 경영방법인 지리정보시스템을 도입해 금융정보화에 앞장서 지역밀착 금융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뉴질랜드 총리 부부가 함께 참석한 만찬이었습니다. 제 능력 보다 큰 명예였죠.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고 나니 금융인으로서의 몸가짐과 자세를 바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겸손해 한다. 두 달 뒤인 99년 8월 경기도 신지식인상도 수상했다.

2002년 1월 안산으로 직장을 옮긴 그는 호수동에 있는 아파트에 살았다. 안산에 대기오염과 악취 문제가 연일 언론에 보도되던 시절이었다. 특히 날씨가 흐린 날이면 악취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악취로 고생하던 그는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는 당연한 소망을 꿈꾸게 된다. 초등학교 교사로부터 “악취 때문에 운동장에서 수업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교사가 시샵으로 활동하던 ‘안산 악취 끝’ 다음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해 악취근절 활동을 시작했다. “고잔신도시를 계획한 수자원공사가 악취 문제에 대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시민들에게 미안함 조차 갖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일부 환경단체들이 수자원공사로 부터 사업비 등을 받으며 수자원공사와 짝짜꿍 하던 일도 버젓이 일어나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초대 시샵이었던 선생님이 교사라는 한계로 인해 시샵 자리를 내려놓자 그는 2대 시샵을 맡게 된다. “악취문제를 시민의 힘으로 풀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회원들과 함께 주요 거점에서 캠페인을 펼치는 한편 악취발생이 의심되는 현장을 제보 받고 감시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노력으로 시흥시 정왕동 주민들까지 참여해 4천300명이 카페 회원으로 늘어났다.

그는 폐기물업체 관계자들이 사용하는 채팅방에 몰래 입장해 그들끼리 나누는 이야기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정부의 단속 정보를 미리 알고 있더군요. 그래서 정부나 지자체도 우리 편이 아니라는 확신을 하게 됐죠.” 그런 사실을 알게 된 후 안산시와 경기도에 저항하게 됐고, 급기야 반월산업단지를 방문한 손학규 당시 경기도지사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손학규 지사에게 공단 관계자의 보고는 거짓이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차량)창문을 열고 염색공단과 가죽공단을 가봐라”라며 손학규 지사가 악취문제 해결에 새로운 인식을 주문했다.

한편으로는 당시 해양연구원에 근무하며 지역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열린우리당 제종길 당협위원장과 한나라당 박순자 지역위원장, 송진섭 시장 등 지역 정치권의 악취근절을 위한 관심과 노력을 이끌어 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악취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이 나왔다. 원포공원과 원곡공원에 악취 측정 장치가 설치됐고, 악취물질을 배출하다 3번 적발되면 공장을 폐쇄하는 3진 아웃제가 도입됐다.

당시 대림아파트에 살면서 악취 피의자들을 엄단했던 수원지검 안산지청 정환균 검사에게 대부포도 10상자를 부상으로 ‘시민의 상’을 수여해 격려했다. 악취의 주된 원인이 되고 있던 염색공장과 가죽공장의 외부 이전이 논의되기 시작했고, 악취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초지동과 원곡동, 정왕동에서 악취 전수조사와 초지동 주민 건강 역학조사를 위해 10년 추적 활동이 결정됐다.

당시 송진섭 안산시장은 민간환경감시단 예산을 확대하는 한편 안산시 예산으로 300억 기금을 만들어 악취저감시설 설치를 무이자로 지원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그는 또 악취 피해가 큰 신도시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 협의회장을 맡아 조직적으로 아파트를 돌며 회원을 모집하고, 악취에 대한 문제점을 공유하고 거리 캠페인을 펼쳤다. 당시 원외 지역 정치인이었던 제종길, 박순자 위원장과 송진섭 시장 등 지역 정치인들도 카페 회원이 되어 2004년 2월 9일 악취방지법 제정에 힘을 보탰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안산 악취 끝’ 회원들의 활동에 적극 협조했지만 대부분의 반월산업단지 CEO들과 일부 안산시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강남 등 외부에 거주하던 CEO들은 내부고객인 안산에 살고 있는 직원들에 대한 생각이 부족해 “신도시 보다 공단이 먼저 들어왔는데 시민들이 감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맹랑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일부 시민들은 “왜 악취문제를 꺼내들어 아파트 값을 떨어뜨리느냐?”고 반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외부고객 뿐만 아니라 내부고객이 만족해야 진정으로 좋은 회사라는 확신과, 수억원의 이익을 내기 위해 수백억원의 사회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신념으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악취근절 활동을 이어갔다.

지금도 초지동과 원곡동, 정왕동에서는 북서풍이 불 때면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나곤 한다. 그는 “근본적인 해결이 안됐다는 반증입니다. 현재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미세먼지와 마찬가지로 악취는 생활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며 근본적인 악취 해결을 위해 생존권 우선차원에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다음호에 계속>

서정훈 기자(visionans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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