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아주 적은 당신께
욕망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아주 적은 당신께
  • 안산뉴스
  • 승인 2019.03.2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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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하 안산대 교수

며칠전 ‘유대인 이야기’라는 글을 받았습니다. 하루 한 컵 제공받는 물을 조금만 먹고 나머지는 아껴 세수도 하고 옷 조각을 적셔 이도 닦으며 그 시간을 견뎌내 생존한 유대인 이야기였습니다. 욕망에만 충실한 짐승과 달리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그들의 선택이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공통된 특징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생존 유대인,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던 이들’ 이란 프레임이 인간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선택을 격려하는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이 말의 이면엔 ‘생존하지 못한 이들, 한 컵의 물로 몸을 닦기 보단 본능을 위해 마셔버린, 그래서 인간다움을 포기한 이들’ 이란 해석의 여지가 내포돼 있습니다. 그러나 혹독한 잔혹의 공간, ‘절대 적응되지 않는 배고픔’, ‘빵 한 조각을 긴 하루 동안 나눠 먹으려는 피눈물 나는 노력’ 안에 있던 당사자의 극한 고통을 ‘인간다움을 포기한’이란 언어로 손쉽게 단정하는 것은 그의 슬픔에 닿지 않는,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하나 더 추가된 가해자의 언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던 이들’의 고통스런 경험으로 당신과 나와 우리의 삶을 다행이라 위안하거나, 더 나아지게 하는 자극으로 삼기 위해선 선택의 약자였던 피해자가 아니라 매순간을 선택할 수 있었던 가해자를 통해 그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을 자신에게서 예견하고 답을 준비해야 합니다.

수용된 유대인을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취급하도록 하는 구조 속에서도 그 행위들에 대해 질문하고, 고통스럽게 윤리적 갈등에 직면한 소수의 가해자들. 동물의 복종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에 가능한 윤리적 고통을 기꺼이 겪어낸 이들의 서사 속에서 우리는 인간다움과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선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세월호 즈음입니다. 태어난 시간과 공간, 그 순간의 향과 온도로 이루어진 서사가 절대 같을 수 없는 한 존재 한 존재로서의 삼.백.네.명.의 죽음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우리의 눈앞에서 가라앉았습니다. 삼백네개 서사의 동 시간 죽음이란 지나치게 날카로워 시간이 지나고 지나도 베입니다.

끊임없이 베이는 이들 앞에서 당신의 아파트로, 당신의 종교로, 당신의 직함으로, 당신의 소속으로, 그러니까 당신의 부와 당신의 욕망으로 당신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은 함께 울 뿐이지 당신의 욕망으로 치워지는 장애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어떤 천사가 나에게 왔다고 합시다. 이때 그가 천사라는 것을 무엇이 증명할까요? 그의 음성이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서 온 것이라고 무엇이 증명할까요? 또는 잠재의식이나 병리적 상태에서 온 것이 아니라고 무엇이 증명할까요? 만약 어떤 음성이 나에게 전해진다면, 그 음성이 천사의 목소리라고 결정할 사람은 언제나 나 자신입니다.

내가 이런저런 행위를 옳다고 할 경우, 이 행위가 나쁘지 않고 옳다고 선택하는 것 또한 나 자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순간 나는 모범적 행위를 하고 있다고 강박하고 있습니다. 결국 각각의 인간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인류 앞에서 내 행위를 본받도록 행동하는 존재, 내가 바로 그런 존재 아닌가, 라고 말입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고정불변한 사고와 그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 믿음에 기반한 행위, 그리고 다시 종교적 장치, 혹은 정치적 신념, 혹은 정신분석 이론, 무엇이든 행위를 변명 할 수 있는 도구를 통해 그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실은 개인의 선택에 기반한다고 말합니다.

개인의 선택은 기존 관습을 강화하거나, 불합리한 폭력에 기여한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개인 뿐 아니라 집단 전체에 앙가제(참여)합니다. 1940년대에 쓰인 글이라는 점에서 실은 종교 뿐 아니라 자본과 권력의 전체주의에 대한 맹목적 신념, 그러니까 수치도 없이 욕망에 지나치게 정직한 행위를 설명하는 시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확고한 언어를 선택하지 않을 소수의 당신, 그러나 당신일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을 당신의 윤리적 고통과 갈등이 존재함을 압니다. 긴 글이었지만, 4월 16일을 앞에 두고 그런 당신께 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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