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 서정훈 기자
  • 승인 2019.03.20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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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병교 전 세람저축은행장

류병교 저축은행장은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전다. 걷는 모습을 보지 않는다면 그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그만큼 그는 건강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지금의 저는 어머니 희생으로 가능했습니다.

부모님은 수술자국 300개가 생기도록 소아마비를 고쳐 주려고 논을 팔아 저를 뒷바라지 해주셨습니다. 제가 보상해야 할 몫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 8시간이 걸리는 소아마비 수술을 5차례 하는 과정에서 매혈로 C형 간염을 앓게 됐다.

그랬던 아들이 금융인으로 신지식인 상을 받았을 때 어머니께서 TV에 나온 아들을 보고 감격해 우셨다고 전한다. 그는 부모님께서 소아마비 빼고 다 주셨다고 생각하고 부모님의 제사를 정성을 다해 모신다.

류병교씨는 이천에서 제일 좋은 쌀을 생산하는 중농의 학자 집안에서 5대 독자로 태어났다. 집안에서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랐다. 그가 소아마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4~5살 때였다. 유리에 넘어졌는데 손바닥에 피가 철철 흘렀다.

그 때부터 그는 독한 맘을 먹게 됐다고 기억한다. “아버지께서 40살에 저를 낳으셨어요. 부모님 연세가 많고 형제가 없으니 기댈 곳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독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장애인이라고 혜택을 받으면 그게 다 마음의 빚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을 돕는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다. 4km 거리의 학교를 도보로 등교했고, 장애라고 배려 받는 것을 거부해 교련과목도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수업을 받았다.

부모님한테 손 벌리는 것이 마음에 걸려 24살이 되어서야 대학에 들어가 1~2학년 때는 과외로, 3~4학년은 서울 흥인시장에서 옷장사를 했다. 새벽 4시 30분에 물건을 펼치고 점원이 출근하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한 뒤 데리고 있던 조카 2명의 과외교육을 직접 한 뒤 저녁 8시에 시장에 다시 나가 장사를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청년 류병교는 도전정신을 몸에 익혔고 성취의 기쁨을 느꼈다.

그의 이런 훈련이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게 하는 성격으로 단련했다. 중도포기란 없었다. 그가 즐기는 취미생활에서도 이런 성격이 잘 드러난다. 그는 두 가지 취미생활을 한다. 하나는 탁구다. 틈틈이 실력을 쌓은 탁구 실력은 수준급이다.

240명이 출전한 안산지역 4부 대회에서 3위 입상의 실력을 갖고 있다. 어려운 장애인 가정을 사회적 책임으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는 작년에 안산시장애인체육회 상임부회장 임기를 마쳤다. 장애인체육을 돕고 싶은 그의 마음은 활동비 월 300만원 중 절반인 150만원만 사용하고 나머지 150만원은 사비로 충당하며 활동했고, 시화방조제에서 장애인 체육인을 돕기 위한 모금공연을 열기도 했다.

그가 탁구보다 더 애정을 갖는 취미활동은 음악이다. 현재 전국 통기타연합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회원이 2만9천200여명에 이른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것은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부터다. 서울에 있는 병원을 오가던 중 차량정체에 시달릴 때 하모니카를 불면 큰 위안이 됐다.

노후에 아파트에서 어릴 적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으며 배웠던 천자문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던 그가 한문과 함께 하모니카와 통기타를 함께 가르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음악활동을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재능 나눔을 통해 받은 혜택을 갚고,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며 품위 있는 노후를 살겠다는 꿈을 갖고 사는 그는 현재 매년 3회의 정기공연과 수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음악을 통해 위안을 받은 그는 영혼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이 음악이라고 확신한다. 안산악취 끝 시샵으로 활동하던 중 C형간염이 재발해 치료 때문에 3년을 휴직했다. 당시 간수치가 1천200이 넘는 절체절명의 급성간염을 치료하기 위해 항암치료로 인해 머리숱이 다 빠지고 극심한 통증을 겪었지만 끝내 병마를 물리쳤다.

그는 악기연주가 고통을 회복하고 조울증을 회복하는데 정서적으로 큰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조울증으로 아파트 8층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습니다. 그 고통을 견뎌내는 데 가족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악기연주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지금은 아프리카 타악기인 잼베까지 다룬다. 피폐한 사람들이 공연을 통해 평온해진 모습을 보고 나면 주는 것보다 받은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제일요양원에서 매달 한차례 생일을 맞은 분들을 위해 공연을 한다. 공연을 마치고 난 날 친구가 울면서 “네가 나 보다 낫다”는 전화를 해왔다. 친구 어머니께서 그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계신데 찾아뵙지 못한 아들을 대신해 아들 친구가 찾아와서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준 것이 고마워 아들에게 이야기 한 것이다.

그는 공연을 할 때 특히 시설 관계자들에게 관심을 쏟는다. 관계자들이 행복해야 입소한 사람들에게 잘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 그가 좋아하는 곡은 사이먼 앤 가펑클이 부른 ‘The Boxer’다. 뉴욕에서 혼자 외롭게 어려움을 극복하는 가사가 이천에서 안산으로 이사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는 자신의 모습과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류병교 저축은행장은 가정에서도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아내와 자녀 자랑은 팔불출 못지않다. 부인과의 만남을 궁금해 하자 “삶의 궤적이 나와 닮았다”고 대답한다. 이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인문고등학교 학생회 졸업식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클럽친구로 5년을 지내다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부인은 1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남동생을 키우며 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했다. 부모공경과 자립심이 강해 종손집안에 종부로서 손색이 없었다. 흥인문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던 대학 4학년 때 부부가 됐다. 부인은 중풍으로 고생하던 시어머니를 모시고자 이천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10년간 시어머니 병수발을 들어 이천시 효부상을 수상했다. 아내 뜻을 따라 이천으로 낙향해 금융인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그는 “아내와 결혼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부인 덕에 지금 내 인생을 이뤘다”고 말할 만큼 부인을 사랑한다. 부인은 현재 초지동에서 제과점을 운영하고 있다.

부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그는 두 번째 서른이던 60살에 초등학교 동창 부부 12명과 스페인, 모로코, 포르투갈로 여행을 다녀왔고, 부인의 두 번째 서른이던 작년에는 남미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4월부터 다시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지만 이미 아내와의 여행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올해는 아프리카, 내년에는 오세아니아, 그 후에는 북유럽으로 아내와 단둘이 여행을 다녀 올 계획이다.

3년 전 그는 차녀 결혼식에서 SG워너비가 부른 ‘라라라’로 신부 아버지로서 직접 축가를 불렀다. 장애가 있는 아버지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에 가능한 딸의 요청이었다. 딸의 요청을 받고 그는 남을 위한 공연을 하는데 내 가족을 위해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기꺼이 딸을 향한 축가를 불렀다.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그 딸은 북한어린이돕기를 위해 유니세프에 1년에 하나씩 후원 계좌를 7년째 만들고 있다. 앞으로 20개의 통장을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그는 자녀들에게 하고 싶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도전하라고 가르쳤다. 자녀들은 대학시절 사회참여 활동과 봉사활동을 열심히 해 국제 대학생 봉사 조직인 코피니언 활동으로 필리핀과 영국, 캐나다에 봉사활동을 다녀와 외국어 실력도 수준급이다.

류병교씨는 매년 스승의 날에 찾아뵙는 선생님 두 분이 계신다. 한 분은 이천에서 고등학생 1학년일 때 담임이셨던 김영식 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고2, 고3 때 담임이셨던 유부열 선생님이시다. 김영식 선생님은 오토바이로 류병교 학생을 집까지 태워주실 정도로 제자 사랑이 크셨던 분이고, 유부열 선생님은 고등학교 때 담임을 2년간이나 맡은 데 이어 두 자녀에게도 선생님이라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두 자녀가 고잔고등학교에 재학할 때 그는 학교운영위원장을 맡아 고잔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인 유부열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학교운영위원장을 맡고 보니 학생 1인당 축제예산이 154원에 불과했다. 너무 적은 축제예산에 마음이 쓰인 학교운영위원장으로서 그는 교장선생님을 찾아뵈었다.

그리고 유부열 교장선생님은 제자 류병교에 대한 믿음으로 허락했다. 그는 학부모들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1만 원 이하씩 걷어 학생들에게 1천500만 원짜리 축제를 열어줬다. 그는 10대 때 자신의 성장에 큰 영향을 주셨던 두 분의 선생님을 매년 찾아뵙고 내년에도 뵐 수 있기를 기도하며 매년 사진을 남기고 있다.

류병교 저축은행장은 일터와 취미, 가정, 지역공동체에서 모두 성공한 인생이다. 금융인 부문에서 신지식인 상을 수상하고 지역의 현안이었던 악취해결에 앞장서고 취미생활인 탁구와 음악까지 즐기며 품위 있는 노후의 삶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

부인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돌볼 줄 아는 자녀들로 키워 낸 류병교 저축은행장은 스승의 은혜와 부모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가 겪은 소아마비와 항암치료가 자칫 절망과 비뚤어진 인생으로 빠지지 않고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성공 스토리를 이룬 것이어서 더욱 큰 감동을 준다. <끝>

<서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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