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인찍기(framing)
낙인찍기(framing)
  • 안산뉴스
  • 승인 2019.03.2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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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석(안산시독서동아리네트워크회장)

장장 10여 년의 시간을 끌며 수많은 용사들을 하데스로 내려가게 했던 트로이 전쟁의 원인은 그 전쟁의 규모에는 걸맞지 않은 너무나 사소한 것이었다. 인간 펠레우스와 바다의 요정 테티스는 그들의 결혼식에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 제외한 채 올림포스의 12신을 포함한 모든 신들을 초청한다. 신랑 신부는 혹시 결혼식장에서 에리스가 분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 에리스만 초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에리스는 노여움에 사로잡혀 결혼식에 나타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적힌 황금사과 하나를 던져주곤 가버렸다. 불화의 여신답게 불화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그러자 제우스의 아내 헤라, 지혜의 여신 아테나, 그리고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자신이 그 황금사과의 주인이라고 자처하며 나섰고 황금사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가려달라고 제우스에게 부탁하였다.

그 누구의 편을 들 수가 없던 제우스는 그에 대한 판결을 트로이의 둘째 아들이던 파리스에게 일임하게 되고, 파리스는 세상 최고의 미녀를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이에 아프로디테는 자신이 약속한 대로 파리스와 당시 최고의 미녀 헬레네를 맺어주게 되는데 문제는 헬레네는 이미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부인이었던 것. 이로 인해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를 공격하게 되면서 장장 10여 년에 걸친 대전쟁이 시작되었고 결국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를 비롯한 수많은 영웅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

그런데 과연 에리스는 꼭 결혼식에 소외되어야만 하는 존재였을까? 이동연은 그의 저서 ‘심리학으로 들여다 본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페리우스와 테티스의 행위를 한마디로 낙인찍기라고 명명했다. 이어 그는 이러한 낙인찍기는 이른바 ‘프레이밍 효과’를 발휘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세상만사 모든 것이 그렇듯 그리스 신들에게도 긍정과 부정의 양면이 있었다. 에리스 역시 마찬가지인데 에리스가 비록 불화의 신이기는 하지만 때로 그가 일으키는 갈등은 그 갈등의 대상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구도 불러일으켜 장인, 농부, 상인 등으로 하여금 남보다 더 부유해지도록 노력하게 하고 그 결과 물질문명이 발달하게 하는 긍정적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즉, 파괴와 창조, 갈등과 변화와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에리스는 다 지니고 있었던 셈인데, 페리우스와 테티스는 에리스가 가진 긍정적인 면은 도외시하고 에리스에게 오직 갈등을 일으킨다는 부정적 낙인만을 찍어버림으로 위에서 이야기한 비참한 전쟁의 도화선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프레임은 세상 혹은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틀이자 주장의 근거로 존재하게 된다. 더불어 그 대상에 실제적으로 가해지는 위력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 아직도 만연한 ‘빨갱이’란 낙인찍기와 그렇게 낙인찍힌 대상에 대해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 ‘빨갱이는 저런 대접을 받아도 당연해!’라는 인식을 보면 프레임의 막강한 힘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지난 주 본 지면에 ‘좌파 교육이 한국 교육을 망친다’는 제하의 칼럼이 실렸다. 그 칼럼은 현재의 한국 교육은 하향평준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자사고와 외고의 폐지 시도, ‘국어기본법’에서 한글만을 한국어 문자로 정해 놓고 교육부가 한자를 교육하지 않는 것, 그리고 서울시 교육청이 교사를 ‘선생님’이란 호칭 대신 ‘쌤’이라고 부르자는 제안을 내놓은 것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여기까지는 대체로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칼럼은 말미에 어떤 근거의 제시도 없이 이런 교육이 좌파 교육이며, 좌파 교육이 한국 교육을 망치고 있다며 현 교육체제에 대해 낙인을 찍고 있었다.

만일 누군가 그 칼럼을 보고 ‘역시나 보수는 진보 진영에 맹목적 증오감만 가진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는 수구 세력’이라고 말한다면 동의할 수가 있을 것인가? 낙인찍기는 내 주장에 대한 선명성과 피아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효과는 있을지라도 합리적인 토론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뿐이다. 따라서 낙인찍기는 신중하게 행해져야 할뿐더러 낙인을 찍어야 한다면 그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도 반드시 따라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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