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과 4.16의 시간
4.3과 4.16의 시간
  • 안산뉴스
  • 승인 2019.04.0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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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하 안산대 교수

순이삼촌을 읽었습니다. 실은 순이삼촌이라는 소설보다는 현기영이라는 작가에게 눈길이 더 갔습니다. 1941년 1월 제주 노형리 출생. 1947년 6살 노형국민학교 입학. 1948년 7살 ‘4.3 사건’ 당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이 불타고 학살당하는 현장을 목격.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 다양한 문학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여 영어교육을 전공하고는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34세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한 뒤,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78년 37세, 그는 제주 4.3을 다룬 순이삼촌을 발표하며 문제작가로 문단의 주목을 받습니다. 1년 뒤, 순이삼촌이 출간되자 그는 군 수사기관에 끌려가 삼일동안 고문을 받고 감옥에 구치되는 등 1개월간 고초를 겪습니다.

그리고 또 1년 뒤 39세, 소설이 다시 문제가 되어 종로서에 끌려가 일주일간 취조를 받고 결국 순이삼촌은 판매금지를 당합니다. 발표되고 3년간 작가는 2번의 고문과 취조를 받았고, 순이삼촌은 1994년 재출간되기까지 14년간 문단에서 사라졌으며, 제주 4.3은 발생한지 30년 만에 소설로 세상에 알려졌다 다시 은폐됩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은 미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해 제주도를 최후의 보루로 정하고 6만 5천여 명의 병력과 각종 중화기를 제주도에 배치했습니다.

일제의 군사기지 건설을 위한 공출과 강제동원에 시달리던 제주도민들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해방은 말 그대로 억압으로부터의 벗어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정부상태에서의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의 친일 경찰과 관리를 해방 후에도 기용했으며, 소련의 반대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는 해방 후에도 외세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현실의 반영이었습니다.

1947년 3.1 기념행사에서 어린 아이가 경찰이 탄 말발굽에 채여 넘어졌지만 경찰은 이를 그냥 지나쳤고, 이에 항의하는 군중에게 쏜 총으로 6명이 숨지고 8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미군정 경무부는 책임자 처벌은커녕 경찰을 추가 파견해 참가자들을 검거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3월 10일 제주 직장인의 95%가 참여하는 총파업이 진행됐고, 미군정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했습니다. 1948년 4월 3일을 기점으로 1954년 9월까지, 약 25,000명에서 3만명, 제주도민의 약 10%가 빨갱이란 이름으로 미군정 경무부의 대대적인 토벌로 희생됐습니다.

작가 현기영은 그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낸 노형리에서 7살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마을이 불타고, 동네 친구들과 이웃들, 집안의 어른들이 한 날 한 시에 죽고, 그 놀람과 두려움과 분노를 어쩌지 못하면서도 8년간 억압당한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7살 아이가 15살 소년으로 성장하며 그 트라우마를 문신처럼 몸에 새겼겠지요. 북제주에 해당하는 노형리에서만 537명,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이웃마을 북촌리에서 418명의 제주도민들이 하루 이틀 사이에 학살당했습니다.

현기영은 섬을 떠나 육지에서 진학하고 결혼하고 직업을 갖는 동안에도 1948년 4월 3일로부터 시작된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1978년 박정희의 군부독재 시절 누구도 입 밖으로 내지 않던 제주 4.3을 결국 소설로 토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아마 그 소설이 자신을 익숙한 일상 밖으로 몰아내리란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2012년 오멸감독은 영화 지슬을 세상에 내 놓았습니다. 오멸감독은 1971년 제주에서 태어나 청년기까지 제주에서 성장했습니다. 1971년은 1948년으로부터 한참을 떨어져 있었으나, 2012년 마흔 두 살 그의 삶은 제주 전역을 통해 3만 명의 피해자를 낸 4.3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떨어져 있지 않았을 겁니다.

7살의 어린 시절을 놓아주지 못한 현기영에게도, 경험하지는 못했으나 그 공통의 감각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청년 오멸에게도 글과 영화로 토해내는 제주 4.3은 자신에게, 가족에게, 공통의 비통을 지닌 채 멈춰버린 제주에게 애도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오늘은 4월 3일이고, 며칠 뒤면 4월 16일입니다. 71년이 지난 제주에게도 여전히 애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2014년 4월 16일로부터 한 해, 한 해, 한 해, 한 해, 그리고 또 한 해가 지난 세월호는 여전히 생생하고 여전히 컴컴하므로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선배와 후배들에게, 그리고 안산에게 아직도 긴 애도의 시간과 분노의 시간과 그보다 더 큰 명확과 객관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 4월 3일 안산은 여전히 찬바람에 추위가 느껴집니다. 제주는 여전히 아름답겠지요. 출생의 기억이 모두 다른 당신들의 동일한 죽음 4월 3일과 4월 16일 한 날의 곡소리가 또다시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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