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첨의 미학
추첨의 미학
  • 안산뉴스
  • 승인 2019.05.01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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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철 우리동네연구소 퍼즐 협동조합 이사장

지방자치, 주민자치, 지방분권, 주민자치회 등 최근 자치와 분권이라는 말이 참 많이도 쓰이고, 연구모임이나 교육하는 자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해의 정도에 따라 스스로 다스린다는 자치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관점이 사뭇 다른 것 같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생각이 다르고 지방정부와 주민자치회도 서로 동상이몽이다. 중앙정부는 표준안이라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내려 보내고 지방정부는 권한과 예산을 달라고 요구한다. 지방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엄동설한에 길거리에서 구호를 외치고 집회를 하기도 한다. 중앙정부는 향후 지방자치가 본격화될 것에 대비해 현행 20% 정도인 예산을 40%까지 이양한다는 방침이라고 하나 언제쯤 이루어질지에 대한 구체적인 로드맵은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치를 외치고 분권을 외치는, 사자와 같은 우렁찬 함성 속에 주민자치를 이야기하는 자치단체는 별로 없다. 필자도 지지난 겨울에 자치분권을 외치며 국회, 기관을 찾아다니고 ‘내 삶을 바꾸는 자치분권’, ‘지방을 살리자’라고 외쳤지만 정작 주민자치는 관심 밖이고 존재감도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주민자치 실현을 위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도 열매가 별로 열리지 않는다. 지방자치를 하겠다고 하면서 자치의 핵심인 주민자치에는 관심도 없고 소양도 부족한 지방자치단체의 모습은 넌센스다. 제도나 조례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문제의식조차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20여년 전 행정자치부의 ‘읍면동 기능전환’ 방침에 따라 시작된 주민자치위원회는 행정복지센터의 보조 역할을 해왔다. 자치는 언감생심이고 프로그램 관리 위원회라고 하는 것이 적합한 표현이다.

최근 주민자치회 조례를 마련한 지역을 중심으로 주민자치위원회를 대체하는 주민자치회가 속속 생겨나고 있는데 이는 단순하게 이름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권한도 주어진다. 주민자치위원회가 해산되고 새로이 구성되는 주민자치회는 분야별로 전문적 소양이 있어야 하고 일정 시간의 교육을 이수한 사람을 대상으로 위촉한다. 지역에 따라 약간의 편차는 있을 수 있으나 50명 내외로 선발하는데 위원 선정위원회나 추첨을 통해 결정한다. 과거, 선정위원회를 통해 심사하는 경우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구성되지 못하여 외부의 입김이 작용하는 사례들이 발생했다.

시흥시의 경우 주민자치회 1기의 임기가 끝나고 2기 위원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선정위원회의 면접 결과에 불복하여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유인즉 1기 때 임원을 했던 위원이 특별한 사유 없이 해촉되었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문제는 선정위원회 구성을 누가 할 것이며 객관적으로 구성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지역 사례 중에 성공적인 모델이 없었다. 주민자치는 가장 직접적인 민주주의인데 시스템은 거기에 반한다면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대안으로 추첨을 선택하는 지역이 대세로 자리 잡게 되었다. 주민자치 교육을 이수한 신청자 전원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주민자치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황당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필자도 처음에는 그랬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모를까 객관적인 방법으로 전국에 있는 조례에 가장 많이 채택되었고 그나마 이견이 거의 없다. 열심히 마을 일을 하던 사람들이 배제될 것에 대한 우려가 있지만, 누구도 불복할 여지가 없고 투명하다는 장점이 있다. 실제로 민주주의 시초라 불리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의 핵심도 추첨제였는데 평등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특정한 권력자의 지배가 아닌 누구라도 지배자가 될 가능성을 열어 둔 것이다. 어설프고 불공평하게 심사하느니 차라리 추첨이 안전하며 자리보다는 주민자치에 걸맞은 역량 강화에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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