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사회적 에너지 소모 중단을 촉구하며
불필요한 사회적 에너지 소모 중단을 촉구하며
  • 안산뉴스
  • 승인 2019.05.1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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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석 안산시독서동아리네트워크 회장

필자는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서사학에 관해 공부하고 있는데 이 분야에 대한 주된 이론의 대부분은 서양의 학자들이 수십 년 전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막상 공부해 보면 딱히 그렇게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물론 발표 시점과 현대와의 시간 차이에 의한 착시 효과일 수 있겠지만) 그런 이론을 가져다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또 그것을 연구 성과로 발표하곤 한다.

그래서 그런 이론을 공부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왜 이 분야에 관한 우리나라 학자들의 이론은 배우지 않는 것일까? 이론이 없어서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만들지를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만들지를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외국 이론이라면 알아서 한 수 접어주는 사대적인 자세와 국내 연구 수준에 대한 비하 의식, 세계적으로 통용되기 위한 전제 조건인 영어로 논문 쓰기라는 장애물, 더불어 우리나라 대학 교수들의 밥줄을 쥐고 흔드는 교수 임용 평가 시스템에서 비롯된 구조적인 문제 등등 두루두루 살펴보아야 할 여러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에 더해 비록 지엽적인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내부 에너지의 불필요한 소모’도 그 원인들 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한때 우리의 국문학사를 연구하려고 할 때 부딪쳐야 하는 문제가 바로 북한에 적을 둔 작가들에 대한 것이었다.

분단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에 우선시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시기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에 사회주의에 경도했거나 혹은 해방 후 월북 등의 이유로 북한에 머물게 된 작가들에 대해서는 그들 작품의 연구는 물론이고 그들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거론하던 것조차 금지되었었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문학과 문학사가 연구될 수 없었던지라 백석을 백O, 정지용을 정O용, 벽초 홍명희를 홍OO으로 표시하는 등의 고육지책을 쓰면서 조심스레 그들을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그들 중의 하나를 연구하려다 보면 어딘가로 불려가 왜 그 연구를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기에 자연히 그 분야에 대한 연구는 움츠러들거나 아니면 한쪽으로 편향된 시각으로 만의 연구가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자연스레 우리 학문의 지체라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학계의 구성원들을 좌와 우, 혹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의 진영 안에 가두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이념적 색채와 관계없이 학문적인 논의와 연구가 가능한 사항들에 대해서조차 이념적 색깔을 입혀 상대 진영에 대해 공격을 가하게 되고, 자연스레 반대 진영에서는 그에 대한 방어와 반격에 나서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문 연구에 사용되어야 할 각 진영의 상당한 내부적 에너지가 소모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결국 다양성이 부정되는 국내의 토양에서는 창의적이고 독자적인 학문적 성과를 이루어 낼 수가 없었으며 결국 기존의 외국 이론에 기댄 종속적이고 부수적인 연구 성과물만이 양산되는 토대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이 우리 학계만의 문제였을까? 우리 사회는 좌와 우,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각 진영의 미디어를 중심으로 상대방에 대해 가차 없는 공격을 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념적 문제가 아닌 사항마저도 이념적 색깔을 덧 씌어 나와는 다른 진영에 있다면 들을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모든 것이 이념적 문제로 수렴되면서 합리적 토론의 기회는 열리지 못하고 미래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우리 사회의 에너지가 감정 분출의 동력으로 소모되고 있다면 너무 과한 주장일까?

필자는 결코 양비론적으로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이제는 다소 진부한 말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적어도 상대가 좌파 혹은 우파이기에 그들이 제안한 정책과 주장마저도 이념적인 색깔을 덧 씌어 비판하는 행태만은 거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민생 문제에 관련된 정책들만이라도 정책 그 자체의 내용을 가지고 그 실익을 따져 볼 때 논의가 가능한 것이지 상대방을 이념적으로 공격하는 한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토론은 난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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