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리그
  • 안산뉴스
  • 승인 2019.05.22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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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철 우리동네연구소 퍼즐 협동조합 이사장

일본 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 중에 세타가야(도쿄도에 속하는 23개 특별구 중 하나) 구청이 있다. 1960년에 건립되어 거의 60년 동안 구청사로 사용하다가 건물이 노후화되면서 리모델링과 재건축 중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역사를 살려 옛것에서 새로움을 찾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하자는 의견과 내진 설계를 기본으로 재난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이 상황에서 주목할 것은 행정이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무려 4년 동안 주민의 의견을 묻고 수렴하는 과정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보존에 방점을 둔 리모델링 의견이 우세했고 그렇게 결정되는 듯했으나 도쿄 인근에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사업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쉬이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구청 측은 전문가와 주민의 신청을 받았고 추첨으로 선정된 주민대표로 ‘검토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리고 설계자와 설계과정, 시공의 전 과정을 주민의 의견에 따라 진행하기로 선언했다. 검토 단계부터 주민들의 철학을 반영한다는 것으로, 사례가 없으니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일동은 몇 년 전부터 다양한 외국의 사례를 공부하고 어떻게든 접목해 보려는 노력을 해왔고 의미 있는 성과도 만들어 냈다. 수십억이 들어가는 체육문화센터 건립계획 초기 단계부터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참여하여 상당 부분 의견이 반영되었고 행정안전부 지원, 행정복지센터 내에 만들어진 활력소 공간도 주민들의 손으로 만들어 냈다. 이렇듯 자치역량은 늘어가는데 정작 필요한 권한은 없는 넌센스의 상황이다.

안산에 주민자치회 조례가 없다는 이야기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했고 행정이나 의회가 안 움직이니 주민들이 조례연구회를 만들어 지난해 여름부터 모이기 시작했다. 연구에 그칠지 모르나 행정안전부의 표준조례안과 전국에서 만들어진 조례안을 검토하여 안산에 맞는 모범적인 조례를 만들어 보고자 고민에 고민을 더했다. 시간이 남아서, 할 일이 없어서 모인 것이 아니고 해가 바뀌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는 아마도 울림 없는 메아리를 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만의 리그’란 영화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미국 프로야구 선수들이 전쟁터로 가면서 리그 진행이 불가능해지자 구단주들이 모여서 여자 프로야구 리그를 만들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팀이 구성되고 리그가 시작되었지만, 여론의 평가는 부정적이었고 경기를 보러 온 관중들은 야유를 보낸다. 설상가상으로 감독마저 선수들을 무시하고 구단주들은 흥행을 위해 미니스커트를 입게 한다. 강속구를 던지고 홈런을 쳐야 인기를 얻는 종목 특성상 여성들의 기량은 한계가 있었지만, 선수들은 프로가 된다는 기대와 설렘으로 힘든 연습과정을 견뎌냈다. 노력한 만큼 성과가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개막 경기부터 팀을 해체하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위기를 맞는다.

하는 수 없이 관심을 끌기 위해 묘기도 부리고 이벤트를 만들어 겨우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중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관중들의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감독도 열성적으로 지도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끝나고 선수들이 돌아오자 리그는 해체되고 여성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필자는 주민자치회 연구모임에 나가면서 전문적이지도 않고 체계적이지도 않은 마치, 급조된 선수와 같은 마음이 있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모임을 같이 하셨던 분들을 폄훼하고자 함이 아니라 서글픈 현실이다.

다른 지역은 행정과 의회가 나서서 틀을 만들고 힘을 불어넣어 주는데 우리의 처지가 너무 초라하다. 며칠 전 안산형 조례제정을 위한 토론회를 여는데도 안산시와 안산시의회는 이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세타가야처럼 시공의 전 과정을 주민의 의견에 따라 진행하기로 선언하는 행정을 기대하는 것이 그림의 떡인가! 우리는 언제까지 부러워만 해야 하는 건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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