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안산시문화유산이야기(4)
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안산시문화유산이야기(4)
  • 안산뉴스
  • 승인 2019.05.2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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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領議政) 김양택(金陽澤) 선생 묘

안산시 향토유적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는 김양택 선생의 묘역은 상록구 건건동 산40-22에 있다. ‘삼천리’라고 불리는 마을에 있는데, 삼천리 마을은 아랫삼천이와 윗삼천이가 있다. 김양택 선생의 묘는 아랫삼천이에 있다.

안산시 향토유적으로 2014년 3월 지정이 됐지만 오랫동안 후손들이 돌보지 않아 현재는 안산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김양택(1712(숙종38)~1777(정조1)은 1767년(영조43)에 우의정이 된 뒤, 1776년(영조52)에 영의정에 오른 인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서(士舒), 호는 건암(健庵). 김장생(金長生)의 5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숙종의 장인 만기(萬基)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진규(鎭圭)이다.

1741년(영조 17)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74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헌납(獻納)·부제학(副提學)을 거쳐 원손사부(元孫師傅)·대사성·우빈객(右賓客)·대제학을 역임했다. 1767년 우의정이 된 뒤, 1776년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사후인 1784년(정조8) 아들 김하재(金夏材, 1745~1784)가 역신(逆臣)으로 몰려 장살 당하자 벼슬을 추탈 당했다. 뒤에 다시 복관되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가 대제학을 역임,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는 ‘건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묘역에는 비갈, 상석,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 등이 있다. 비갈은 1780년 오석(烏石)으로 건립됐다. 비갈의 비문은 이조판서이자 대제학인 황경원(黃景源)이 지었고, 글씨는 손자인 김두공(金斗恭)이 썼다. 특히 비문의 앞면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겼다. 안산지역에서는 유일하게 비석에 새겨진 한석봉의 글씨를 볼 수 있다.

묘역에는 김양택과 부인 남양홍씨의 합장묘가 있는데 봉분의 크기는 540×240×195cm이며 안산지역에 현존하는 조선시대 묘 중 최대 크기이다. 묘비의 크기는 비신 60.5×146.9×28.5, 비대 109.5×73×38cm이다. 좌측 문인석의 크기는 159cm이고 우측 문인석의 크기는 168cm이다 이 외에 망주석이 한 쌍 있는데 좌측 망주석이 189cm, 우측 망주석이 195cm이다.

이곳은 후손들이 잘 돌보지 않아 잡초와 잡목이 우거지기는 했지만 조선시대의 분묘를 연구하고 한석봉의 글씨를 탁본하기 위해 여러 학자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한편 김양택 묘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說話)가 하나 있는데, 김양택의 묘를 건건동 삼천리 현 자리에 쓸 때에 회닺이를 하는데 선소리꾼이 “양택의 맑은 물을 가재가 흐려놓는다”라고 선소리를 반복해서 메겼다고 한다. 이는 훗날 김양택의 아들 하재가 역적이 되는 것을 예언한 것으로 ‘선소리꾼의 예언’이라는 설화로 전해져 내려온다.

(참고문헌)

-디지털안산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안산시사(안산시사편찬위원회 2011)

-안산 아름다운 향토문화(안산시 2015)

-daum cafe–안산의 역사와 문화

(http://cafe.daum.net/ansan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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