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이 바뀌면 이론도 바뀝니다”
“현장이 바뀌면 이론도 바뀝니다”
  • 여종승 기자
  • 승인 2018.10.24 14: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천응

<주요프로필>

-1962년 전남 순천 출생

-안산이주민센터 대표

-사단법인 국경없는 마을 이사장

-안산다문화교회 담임목사

안산은 다문화도시다. 전 세계 100여개 국가의 이주민 8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안산인구의 10%다. 대한민국에서 어느 누구도 이주민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1994년부터 안산이주민센터를 설립해 운영해오고 있는 인물이 있다. 박천응(56) 대표다.

박 대표는 오롯이 24년이란 세월동안 이주민을 위한 일에 매진해오고 있다. 긴 과정 속에서 슬럼프도 잠시 있었지만 현재도 이주민을 위해 활동한다. 그는 수많은 현장경험과 끊임없는 학습으로 이론을 겸비하며 국내 다문화 1호 박사가 됐고 대학 강의도 나간다. 어느 분야든지 ‘현장이 바뀌면 이론도 바뀐다’는 박 대표다. 이주민 문제로 국내 어디를 가도 인정받는 박 대표가 활동 주 무대인 안산에서는 눈의 띄지 않는다. 올바른 의견을 너무 많이 내서 공직사회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다문화도시 안산을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안산뉴스 창간에 맞춰 박천응 대표를 ‘여종승의 현장인터뷰’ 1호로 만났다.

-안산 원곡동에 언제 어떻게 오게 됐나.

“1989년이다.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일반 목회보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한 목회를 설계했다. 안산에 친척이 살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안산을 선택하게 됐다. 그 당시만 해도 공단을 끼고 있는 안산이 어렵게 사는 맞벌이 가정들이 많았다. 한마디로 빈민 가정이었다.

빈민 가정 자녀를 위한 공부방을 선부2동에서 열었다. 경기도 최초로 시범 공부방으로 지정받았다. 공부방은 현재의 지역아동센터다. 안산과의 인연이고 시작한 일이다.”

-안산이주민센터는 어떤 곳인가.

“안산이주민센터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서울서남노회에서 설립한 곳이다. 국적과 인종은 물론 피부색의 차별 없이 내국인과 외국인이 함께 어우러져 국경없는 마을을 만들어가는 일을 하고 있다. 이주민센터에 ‘사단법인 국경없는 마을’이 있고 부설로 ‘코시안의 집’과 ‘한국다문화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이주민을 위한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안산에 처음 왔을 때는 다문화, 이주민을 위한 활동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1992년부터로 생각된다. 공부방을 운영하며 활동하다 보니 외국 노동자들의 임금체불과 폭행 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걷고 있는데 이주 노동자가 지원을 요청하더라. 당시 이주노동자가 ‘내가 어디 있나’, ‘내가 어디로 가고 있나’라는 질문 화두를 거꾸로 나에게 던져줬다. 결국 기러기에서의 이주노동자 지원요청이 관심을 갖게 된 동기다.”

-이주민센터 부설로 코시안의 집과 한국다문화학교가 운영 중이다.

“코시안(KOSIAN)은 코리안((Korean)과 아시안(Asian)의 합성어다. 코시안은 한국으로 이주한 가족 구성원을 부르는 말이다. 2003년부터 운영해오고 있다. 취약한 환경에서 자라나는 이주민 아동들의 성장을 돕고 있다. 한국다문화학교는 배우 신민아씨의 후원을 통해 2011년 설립됐다. 국내 다문화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교육과 돌봄을 지원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지난해 말 신 씨의 지원이 끊기면서 운영이 어려워지고 있어 안타깝다.”

-마을만들기가 요즘 트랜드다. 국경없는 마을을 꽤 오래 전에 시작했다.

“원곡동은 반월공단을 중심으로 한국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다. 대한민국 생활수준이 올라가면서 3D업종 기피현상이 나타났다. 이주노동자의 유입이 시작됐고 1997년 IMF로 한국인들은 원곡동을 떠나기 시작했다. 당시 값싼 노동력의 이주노동자가 늘었다. 그 때문에 공단과 가까운 원곡동이 국경없는 마을을 이뤘다. 현재는 도로명도 ‘다문화길’이다. 원곡동은 다양한 외국인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국경없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비전을 세운 것이다. 국경없는 공동체는 국경없는 인권과 국경없는 노동을 통한 국경없는 평화로 ‘행복한 세상만들기’ 신인간운동으로 승화시키고 싶다.”

-끊임없는 학습으로 국내 다문화박사 1호가 됐다.

“50대로 접어들면서 인생후반부 고민이 시작됐다. 대학에서 강의요청도 있었다. 그나마 교육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인하대학교 대학원에서 ‘혼종적 담론비판분석으로 본 한국 다문화담론 비판’이란 주제로 논문을 써서 2013년 다문화박사 1호가 됐다. 우리나라 다문화주의의 핵심 담론은 국가경쟁력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는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화에 따른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 강화 때문에 사회적 약자이자 양극화의 희생물이 됐다. 이주민 문제는 통제와 관리에 초점이 맞춰진 정책 때문에 차별과 배제의 다문화사회라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차별과 배제형 다문화주의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다문화철학 재정립은 물론 인권형 다문화주의 강화, 다문화 시민성 강화, 지역 다문화 공동체 형성과 다문화 비평 전문가 양성 등을 과제로 제시한 논문이다.” -반한활동가로 낙인찍힌 적도 있다. 현재는 어떤가.

“이주 노동자도 우리의 이웃이다. 2004년이다. 법무부가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를 단속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우리나라가 산업연수생 고용허가제도가 있다. 블랙 노동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속은 초과인원을 정리하는 게 취지다. 당시 대책 없이 집중단속을 벌였다. 정부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지나간 일이지만 외국인 노동자 인권을 위한 활동을 하다 보니 정부가 하는 업무에 비협조적인 것처럼 비춰진 것이다. 당시 국회 국정감사 자료에 반한 단체의 반한활동가로 명시돼 있었다.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을 챙기다보니 단속하는 입장에서는 얄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사과도 받았지만 당시에는 황당 그 자체였다. 시대가 바뀌면서 현재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주민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우리나라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려오면서 편견을 가진 탓인지 그들을 지칭하는 단어도 폄하하는 내용이 많았다. 코시안도 새로 만들어낸 단어다. 국제결혼한 사람들이 만나는 ‘파랑새모임’을 하면서 이주민 가족들에 대한 인권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외국인 노동자도 주민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외국인 노동자로 사용하던 용어를 2006년부터 이주민으로 바꿨다. 이제는 우리나라 모두가 이주민으로 부르고 있다. 엄청난 변화다.”

-다문화활동을 하면서 슬럼프에 빠진 적도 있다.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열정이 식더라. 마음속에서 변화가 필요했던 것 같다. 자기슬럼프가 무섭다는 것을 느꼈다. 하는 일마다 의욕이 꺾이고 스스로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회의가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회복력을 갖고 동기부여를 다시 받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가족력이 이주민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전혀 낯설지 않다. 할아버지는 일본에 이주 노동자로 건너갔다. 아버지는 5살 때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의정부 미군분대에 근무하던 아버지 때문인지 외국인이 낯설지 않다. 매형도 외국인이다. 모두가 이주민과 연계돼 있음을 깨달았다. 언제나 어렵고 힘겨운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있다. 현재는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24년 동안 이주민과 함께 한 보람은.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주민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만든 일이다. 원곡동 기존 주민과 이주민 갈등을 해소하는데도 기여했다. 국경없는 마을공동체를 만드는데 초석을 다지기도 했다. 겉으로 보이는 거창한 일보다는 이주민을 위한 원곡동 일원의 휴일 은행업무 편의 제공을 터 줬다. 소소하고 확실한 일상의 행복인 ‘소확행’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그런가하면 안산이주민센터를 거쳐 간 이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잘살고 있는 소식을 접하면 너무나 행복하다.”

-아쉬움이 있다면.

“다문화 관련 일을 24년 동안 꾸준히 해왔다. 우리 사회가 한 분야에서 열정을 바쳐 수고한 사람들에 대한 보람과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풍토가 있다. 사회가 보상은 아니더라도 어느 분야에서나 수고한 사람들에 대한 보람과 가치를 인정해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이주민 관련 일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으로서 수많은 현장 경험을 갖고 있다. 지속적인 학습으로 우리나라 다문화박사 1호다. 활동 본거지인 안산에서는 외면당하고 있다. 행정기관으로부터 위·수탁을 받지 않는다. 거버넌스 위·수탁 시 갑과 을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주민을 위한 활동을 해오면서 무엇이 힘들었나.

“이주민을 위한 정책은 시민사회단체와 공공기관이 힘을 합쳐야 현명한 결과를 낼 수 있다. 과거도, 현재도 그렇게 가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안산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공무원과 사회단체의 역할이 다르다. 안산시다문화지원본부 사령탑이 사무관에서 서기관으로 바뀌었지만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다문화지원본부가 모든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행정기관 사업이 문어발식으로 중첩돼 있다. 다문화지원본부가 주도하다 보니 행정복지센터나 사회단체와 역할 분담이 전혀 안 되고 있다. 이제 관주도를 벗어나야 할 때다. 기초 자치단체는 정책을 내고 시민사회단체의 영역을 배려해야 한다.”

-이주민 정책을 만드는 정부가 할 일은 무엇인가.

“올해 들어 난민문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난민은 한국 주민으로 살아갈 사람들이다. 심사과정이 너무 길다. 그 동안 주거문제는 물론 생활비 문제도 해결해줘야 한다. 심사기간의 장기화는 심리불안정을 가져온다. 난민들에게 의식주 해결을 위해서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문제도 고려해봐야 한다. 다문화 청년들을 위한 정책 마련도 서둘러야 한다. 다문화 20대 청년들의 미래가 없다. 이대로 방치하면 전국적인 사회문제로 떠오를 것이다. 몇 년 후에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안산도 마찬가지다.”

-다문화 도시 안산이 펼쳐야할 시책은.

“안산에 거주하는 이주민 국가가 100여개에 달하고 거주 인구도 8만여 명을 넘어섰다. 안산 인구의 10%가 넘는 숫자다. 이주민 비중이 엄청나게 큰 것이다. 그에 비해 정책이나 배려는 매우 적은 편이다. 특히 이주민의 경우 원곡동에만 거주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는 안산 전역에 퍼져 살고 있다. 안산시다문화지원본부가 하는 일이 원곡동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다. 모든 정책과 혜택이 이주민들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일을 해야 한다. 안산 전체에 번지도록 일해야 한다. 다문화지원본부의 직급만 올라갔지 하는 일은 변하지 않고 있다. 먼저 다문화지원본부의 역할 재정립이 세워져야 한다. 각 동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주민들이 시책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본부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 안산 주민과 동일하게 미등록 이주민 자녀를 위한 조례 제정으로 보육료도 지원해주는 시책을 펼쳐야 한다.”

-원곡동 다문화특구를 활성화하려면.

“원곡동 다문화특구 지정 당시 반대 의견을 냈다. 관주도로 추진할 경우 실패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주민이 많이 모여 산다고 다문화가 활성화되지 않는다. 특구 지정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시장 원리에 자연스럽게 올라타야 하는 것이다. 인천차이나타운처럼 말이다. 원곡동은 현재 이주민 70%, 한국인 30%가 거주하고 있다. 거꾸로 한국인이 퇴출당하고 있다. 오히려 안산시민이 찾지 않는 마을이 됐다. 원곡2동도 백운동으로 이름을 바꿨다. 원곡동을 안산의 또 다른 자랑거리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인이 찾아와서 소비할 수 있는 도시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 관광명소화 해야 한다. 거시적으로 트리플 역세권으로 떠오르고 있는 초지역을 중심으로 시민시장과 안산역, 원곡동을 연계하는 수인선 협궤열차 콘텐츠로 상권을 살려가야 한다.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지역의 전통문화와 이주민문화를 결합한 새로운 디자인이 시급하다.” <여종승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