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안산시문화유산이야기(9)
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안산시문화유산이야기(9)
  • 안산뉴스
  • 승인 2019.07.03 10: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시대 안산군 여단지(朝鮮時代 安山郡 厲壇址)

조선시대 안산군의 여단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경기읍지’에 관아의 북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옛 안산 관아의 북쪽인 수암동 산 1-16 지장골과 소금절이골 사이 해발 118.9m의 작은 능선의 정상에 단을 만들었던 흔적과 다수의 와편(瓦片)이 발견된다.

여단지를 가려면 수암동의 소금절이골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고 안산읍성에서 등산로를 따라 가는 길이 있는데 안내판이 없어 찾기가 쉽지 않다.

이곳은 안산 관아의 북쪽에 해당되는 곳으로 관아에서 직선거리로 0.5㎞ 정도 된다. 여단의 형태는 정방형에 가까우며 흙으로 쌓은 단의 윗부분과 주변에 잡목들이 많이 들어차 있다. 단은 많이 무너져 내리기는 했지만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여단의 네 모서리는 각각 동서남북 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며 규모는 단 윗부분의 한 면이 11.1m로 면적은 123㎡ 정도다.

단의 높이는 1.3m 정도로 바닥에서 약 60°의 경사를 이루고 있고, 여단 윗면은 북쪽이 남쪽보다 약간 높다. 단위에서 많은 양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안산군읍지’에도 여단에 건물이 그려진 지도가 있는 점으로 보아 단 위에 건물이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기와 조각들은 무문와(無紋瓦)가 80% 정도 차지하고 있고 파상문와(波狀文瓦)도 발견되다. 기와는 대체로 회청색의 경질와(硬質瓦)이며 투박하고 견고한 느낌을 준다. 제작기법이나 문양 등으로 볼 때 이것들은 대체로 조선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여단의 단(壇)은 여제단(厲祭壇) 준말로 여제(厲祭)를 지내는 장소다. 여제는 전쟁이나 질병, 형벌 등으로 불운하게 죽은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다. 도성을 중심으로 좌측에 종묘와 문묘, 우측에 사직단이 설치되는데 여단은 북쪽 교외에 위치한다. 지방 군현에서도 치소인 관아를 중심으로 북쪽에 여단을 설치하는 것이 관례다. 여제의 대상은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불행하게 죽었을 뿐 아니라 제사를 지내 줄 후손마저도 없는 외로운 혼령을 의미하는데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고 인식됐다. 이 여귀가 전염병이나 한발(旱魃가물, 가물을 맡은 귀신)의 원인이라고 하여 역병이 유행하거나 한해가 심할 때 국가나 고을에서 여제를 지냈다. 여제가 시작된 것은 조선 초기로 1401년(태종 1) 권근의 건의로 시작된다. 여제는 ‘국조오례의’에 소사(小祀)로 규정됐고 비정기적으로 거행하는 위령제로 정착됐다.

조선시대에는 지방 군현마다 여단의 위치가 지정되고 사직제, 향교 석전과 더불어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여제가 중요한 것은 잦은 전쟁과 전염병의 발생 때문인데, 조선 후기에는 지방의 동제(洞祭)를 통해서 민간에서 행해지게 됐다. 억울하게 죽은 귀신을 위로하는 제사는 굿, 해원제를 비롯한 민간 종교문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제는 조선시대 국가의 지방조직과 구휼을 통한 대민정책 그리고 여역에 대한 공포와 원혼에 대한 연민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제사였다. 안산군 여단지는 2017년 11월 28일 안산시향토유적 제28호로 지정됐다.

(참고문헌)

-안산시사(안산시사편찬위원회 2011)

-안산지역 비지정문화재조사Ⅱ(안산향토사연구소 2015)

-daum cafe 안산의 역사와 문화유산(http://cafe.daum.net/ansanculture)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