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안산시문화유산이야기(10)
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안산시문화유산이야기(10)
  • 안산뉴스
  • 승인 2019.07.10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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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2등공신(宣武二等功臣) 신점(申點) 선생 묘

신점 선생의 묘는 안산시 단원구 신길동 산 9-2번지에 있다. 우진산업이라는 회사 옆의 작은 주차공간에 차를 세우고 보면 산자락의 잘 손질된 잔디밭에 1988년에 세워진 커다란 신도비가 보인다. 신도비 옆의 오솔길로 5분여 오르면 산 정상에 신점 선생의 묘가 있다. 묘역의 좌·우 문인석은 안산지역 최대 크기이나 돌의 질이 좋지 않아 조각이 많이 마모되어 있다. 문인석 외에 망주석 한 쌍이 있으며 산신단으로 보이는 사각의 돌도 보인다.

신점(1530년(중종 25)~1601년(선조 34))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서예가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성여(聖汝), 호는 척재. 영석(永錫)의 증손, 원(援)의 손, 정미(廷美)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이장배(李長培)의 딸이다. 박자봉의 사위이며, 백부 순미(順美)에게 입양됐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명종 사후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659년(선조 2) 정언(正言)이 된 뒤 장령, 수찬, 사간, 교리, 부교리, 부응교 등을 거치며 경연관(經筵官)으로 입시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관련되었던 인물들의 억울함을 푸는데 힘썼다. 1578년(선조 8) 집의(執義)가 되어 야인(野人)의 침입에 대비한 국방의 강화를 역설하는 등 대간으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1584년(선조 17) 경기도와 충청도 감목관(監牧官)이 되어 마정(馬政)을 순시하고 수령을 규찰했다.

또한 전라도 전세선(田稅船)이 안흥량(安興梁)에서 파선되는 일이 자주 발생하여 세곡과 인명손실이 막대함을 알고 이의 해결을 위하여 주변에 항로의 굴착과 창고의 설치를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다. 이어 의주목사(義州牧使)와 강원도 관찰사로 나아갔다가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연경(燕京)에 체류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의 침입 사실을 듣고 명의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의 도움을 받아 병부와 예부에 계속 상주(上奏)하여 요동병(遼東兵) 3천 명을 동원하도록 했다.

돌아와서 승지, 부호군, 동지중추부사, 병조참의, 호조참의, 형조참판, 형조판서, 지중추부사, 도총관, 동지의금부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전란의 혼란을 타개하는 데 노력했다. 1597년(선조 30) 강릉부사로 나아갔다가 판의금부사가 되었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녹훈되었으며,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상례(喪禮)에 밝아 조선 전기 이래 복상시 때 입[笠 :갓. 모(帽). 관(冠)]에 대한 정해진 제도가 없었는데 대상(大祥) 후의 입제(笠制)에 백립(白笠)을 쓰도록 하여 통례로 삼았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며 영의정에 추증됐다. 묘는 1991년 11월 안산시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됐다.

신도비(神道碑) :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신도:神道)인 무덤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묘 주인공의 삶을 기록하여 세운 비,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묘 아래쪽 길가에 세운다.

(참고문헌)

-디지털안산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안산시사(안산시사편찬위원회 2011)

-안산 아름다운 향토문화(안산시 2019)

-daum cafe 안산의 역사와 문화유산(http://cafe.daum.net/ansan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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