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고려시대 여인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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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여인들의 삶
  • 안산뉴스
  • 승인 2019.07.1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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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옥 한반도문인협회 회원

고려시대는 남녀가 결혼하면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다. 연애결혼도 가능했고 이혼과 재혼도 자유로웠다. 무엇보다 재산상속도 균등했다. 이처럼 자유분방한 시대였으니 당연히 여성들의 지위도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성들의 대외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고려시대의 결혼풍습은 솔서혼(率壻婚)이라, 하여 결혼하면 여자는 친정에서 살았고 반대로 남자는 처갓집으로 들어가 일정기간 처가살이를 했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이규보는 ‘혼인을 하면 남자가 처가로 간다. 필요한 것은 다 처가에 의존하니 장인 장모의 은혜가 부모 같다.’라고 했다. 역시 문인이며 학자인 이곡도 “아들과는 살지 않을지언정. 딸은 집에서 내보내지 않는다. 부모봉양은 딸이 알아서 주관한다.”라고 말했다.

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는 천년의 역사이다. 이 기간 동안 여자들은 실명으로 살지 못했다. 이름 대신 성씨나 당호로 불러졌으며 집에서 살림만 했던 여인들은 남편 지위가 곧 나의 지위였다. 세상을 뒤흔든 불꽃같은 삶을 살아온 여성들도 실제본명을 쓴 여성은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살아서 본명으로 불리지 못했던 봉성현군 염씨는 묘지명 때문에 죽어서 이름이 알려진 유일한 여성이다. 남편 최루백은 염씨 묘지명을 651자 30행으로 상당히 긴 내용을 남겼다. 평생 그 누구도 불러주지 않던 아내의 이름을 남편은 묘지명에 기록했다.

묘지명은, 아내의 이름은 염경애이다. 아버지는 염덕방이었고 어머니는 의령군대부인의 심씨이다. 25세에 시집와 병을 얻어 47세에 죽었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세 명의 아들은 학문에 뜻을 두었고 막내아들 단지는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큰딸 귀강이는 이혼하고 집에 돌아와 살고 있으며 막내딸 순강이는 아직 어리다. 중략...

참으로 놀라웠다. 여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던 시대의 두 딸의 본명과 큰 딸이 결혼해서 실패한 것까지 남긴 것을 보고... 여자들의 한스러움을 대변한 것일까. 최루백은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 못하리라,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해 애통하다.’라며 끝을 맺었다. 23년간의 결혼생활을 기록한 묘지명 때문에 고려시대는 어떤 시대였으며 어떻게 어성들이 살았는지를 알게 했다.

조선시대의 부모들은 시집보내는 딸에게 ‘한번 시집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라며 당부했다. 남성우월주의였던 조선시대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 하여 남편은 아내를 내 쫒을 수 있는 일곱 가지 허물이 있었다. 딸이 소박맞고 돌아올 까봐 두려워 한 말이기도 했고 어떤 고난도 잘 이겨내라고 당부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는 일부일처제였으며 출가외인도 아니었다. 요즘말로 돌싱(돌아온 싱글)이었던 큰 딸을 봐도 그렇고,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움과 애틋한 사랑으로 표현한 묘지명도 그렇다. 물론 염씨는 부모봉양 하는 일, 집안일, 자녀교육, 등 나무랄 데 없이 현모양처로 잘 살아오기도 했다. 묘지명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칭찬에서 칭찬으로 끝났다. 고려시대 남자들은 아내에게 이같이 잘하고 살았을까? 그런데 염경애 밖에 몰랐던 최루백은 또 다른 여자 유씨를 만나 재혼하여 3남 2녀를 낳았고 전설처럼 백세 가까이 살았다.

불교가 성행하고 유학을 주장했던 고려시대의 장례절차는 화장을 하고 매장하는 문화였다. 집근처 절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모셔놓고 3년 상을 치루고 유골은 매장한다. 묘소는 처가 무덤으로 가든 시댁무덤으로 가든 형편대로 했다. 매장문화 또한 자유로움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결혼도 이혼도 매장도 자유로웠던 시대에 재산관리도 자유로웠을까? 그렇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호주가 될 수 있다. 부인이 죽으면 재산은 자식한테나 친정으로 간다. 재혼 할 시에는 죽은 아내의 친정으로 돌아간다. 이유는 조상의 제를 돌아가며 지내는 윤행봉사(輪行奉祀)가 있어 아들 딸 구별 안하고 똑같이 분배했다.

최루백은 훌륭한 효자로 유명하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한 최루백은 산으로 올라가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발견했다. 최루백은 “너는 어찌하여 하늘같은 나의 아버지를 해쳤느냐, 내 당장 너를 잡아먹을 테다.”라며 도끼로 호랑이머리를 내리쳤다. 그리고 호랑이 배를 갈라 아버지의 뼈와 살을 수습하여 흥법산에 고이 모셨다. 15세의 어린 소년은 무서움보다는 억울함과 효심이 강해 보인다.

고려는 오래된 역사이지만 개방적인 모습은 현시대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이 사회적 지위가 낮은 시대도 아니었는데 왜, 여성들은 외부활동도 없고 이름도 내세우지 못했을까. 부모봉양하며 집안 살림에만 만족해야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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