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안산시문화유산이야기(12)
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안산시문화유산이야기(12)
  • 안산뉴스
  • 승인 2019.07.2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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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봉공(海峯公) 홍명원(洪命元) 선생 묘와 묘갈

홍명원 선생의 묘역은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산 78번지 해봉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잿머리 성황당이 있는 산과 같은 산이었으나 공단 개발 당시 시화공단으로 가는 길을 내기 위해 해봉산을 잘랐기 때문에 나뉘어졌다. 도로 옆 홍명원 선생 시비(詩碑)가 있는 곳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길이 막혀있다. 경원여객 종점 인근의 ‘돌안말 운동장’에서 올라가는 소로를 이용해야 한다. 올라가는 길은 험하지 않고 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서 누구나 쉽게 묘역으로 오를 수 있다.

홍명원(1573년(선조 6)~1623년(인조 1))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자는 낙부(樂夫), 호는 해봉(海峯)이다. 선조 1597년(선조 3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를 거쳐 선조 33년 검열(檢閱)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와 사서(司書), 수찬(修撰), 헌납(獻納)이 되었으나 권신들을 탄핵하던 끝에 미움을 사서 함경도 도사로 좌천되었다.

그 후 1603년(선조 36) 예조정랑으로 훈련도감낭청(訓鍊都監郎廳)을 겸했고 죽주부사로 죽주산성을 쌓았다. 동부승지, 좌승지를 역임했으며, 부모 공양을 위하여 광주목사를 자원하였고 선정을 베푼 끝에 표리(表裏)를 하사받고 가선대부로 승계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고향인 해곡(海谷:현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으로 내려왔으나 1722년(광해군 14) 후금(後金)과 수교한 사실이 명나라에 알려져 양국 관계가 미묘해지자 급고사(急告使)로 명나라에 가서 이를 무마하였고 후금의 위협에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벼슬하는 동안 위형(威刑)을 쓰지 않고 공정하게 다스린 까닭에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중국의 학사들도 그를 가리켜 장덕군자(長德君子)라 칭하였다 한다. 글씨에 조예가 깊어 초서와 행서에 능하였으며 시와 문장에도 뛰어나 문장은 한나라, 시는 당나라의 것에 정통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해봉집(海峯集)’이 있다. 홍명원 묘의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을 썼다.

홍명원 선생의 묘를 쓸 때 홍명원 선생의 딸 효녀 홍소저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온다 홍소저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자 그 슬퍼함이 매우 심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장지를 정하기 위하여 논의하던 중 잿머리 마을의 산으로 결정하였는데 이때 지사(地師)가 “이곳은 게가 엎드린 모양의 지형이기 때문에 당대에는 크게 될 인물을 볼 수 있는 곳이지만, 파도가 몰아치기 때문에 이곳을 장지로 하면 딸 홍소저의 목숨이 크게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문중에서는 다른 곳으로 장지를 옮기려 하였으나 “어찌 한 사람 때문에 대사를 그르칠 수 있느냐. 그곳이 길지라면 마땅히 안장(安葬) 해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문중에서는 홍소저의 결심을 막을 수 없음을 알고 이곳에 안장하였다. 과연 삼우제(三虞祭)를 지낸 뒤 그녀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렸으며, 아버지 무덤 밑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곳에서는 그 효행을 기려 지금까지도 매년 홍명원의 제일(祭日)이면 제사를 지낸 뒤 그 제물로 다시 그녀의 명복을 빌고 있다. 홍명원 선생의 묘는 1991년 11월 안산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됐다.

(참고문헌)

-내고장 안산(내고장안산편찬위원회, 1990)

-디지털안산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안산시사(안산시사편찬위원회 2011)

-안산 아름다운 향토문화(안산시 2019)

-daum cafe 안산의 역사와 문화유산(http://cafe.daum.net/ansan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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