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한 무게, 기무치가이와 쪽바리
동일한 무게, 기무치가이와 쪽바리
  • 안산뉴스
  • 승인 2019.07.24 10: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명하 안산대 교수

“기무치가이!” 리스본의 벨렝탑을 구경하고 테주강변의 산책로를 따라 한가로이 걷고 있을 때 들린 소리였습니다. 지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본 이는 제가 유일했습니다. 한국인을 폄하하여 부르는 일본어인 ‘기.무.치.가.이’란 뜻을 알아듣는 이가 저밖에 없었으니 당연했을 겁니다. 제 시선의 끝에는 유모차를 끌고 가던 일본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삼십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성과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제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함께 걷던 남성과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기무치 가이’란 언어와 그녀의 시선이 꽤 불쾌했고 부당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당황과 불쾌와 부당의 느낌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걷던 그들과 저의 거리는 벌어졌습니다. 순발력이 약해 순간적으로 해야 하는 판단과 행위를 놓치곤 억울해하던 일이 비일비재했으나 그 순간은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그녀가 들을 만큼 큰 소리로 외친 말이 기껏 ‘기무치가이?’라는 되물음이었습니다. 못 들은 것인지,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그녀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앞서 걷던 남편이 놀라 다가왔습니다. 자초지정을 이야기하니 “그럼 너도 사케가이라고 하지 그랬어” 하는데 피식 웃음이 납니다. 아 이 부러운 순발력. 불쾌한 감정이 한참 동안 지속됐고 뭐라도 따져 묻지 못한 한심한 순발력에 화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제 투덜거림과 분노에 힘이 들었던지 남편은 “그럼 우리도 일본 사람 지나가면 사케가이라고 할까?”라고 말하는데 그건 아니지 싶었습니다. 내가 화났던 건 나를 향해 ‘기무치가이’라고 외친 그 시각 그 장소에서 유모차를 밀고 가던 그녀였기 때문이지 그녀가 속해 있는 일본 전체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전혀 모르는 일본인 여성으로부터 순식간에 들은 ‘기무치가이’란 폄하의 언어는 생각보다 큰 불쾌감을 꽤 오랫동안 제게 남겼으니, 누군가를 폄훼함으로써 그에게 모멸감과 불쾌감을 주려는 그녀의 의도는 성공한 셈입니다. 그녀가 일면식 없는 한 개인에게 역사나 문화, 정치를 통해 형성한 반한 감정을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도록 한 비윤리적 판단의 뿌리가 무얼까 문득문득 궁금했습니다.

오늘 아침, 국내의 공연장에서 연주 중이던 일본인 연주자를 향해 한 관객이 ‘쪽바리!’라고 소리 지르고 공연장을 떠났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외국에서 만난 일본인 그녀나, 일본인 연주자에게 ‘쪽바리’라고 외친 관객이나 국적도, 성별도 다르지만 결국 같은 종류의 사람일 겁니다. 그 또한 일면식 없는 한 개인에게 역사나 문화, 정치를 통해 형성한 반일 감정을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도록 한 비윤리적 판단의 뿌리가 있었겠지요.

한 인간이 나와 동일한 감정을 느끼는 존재라는 자각을 잊었다는 것, 국가와 개인을 구분하지 못하고,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국수주의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려는 입장을 가졌다는 것. 이 정도가 그러한 행위의 뿌리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추측입니다.

위안부 배상 판결에서 진 일본이 이를 경제보복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며 양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항의성 시위로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고 아마도 이것이 일본의 일부 국민들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었을 겁니다. 대상이 일본이든 혹은 다른 국가든 제국주의적 전쟁과 식민지배는 그 부당성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다방면의 보상과 배상, 그리고 무엇보다 사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다양한 세계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미래를 위한 계단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윤리적 행위가 전제되지 않는 국가적 판단에 대한 개인의 저항은 정의롭고 용기 있는 선택이나 그 저항이 다른 한 대상에 대한 폭력과 일방적 폄훼가 되어선 곤란합니다. 그 행위 자체가 우리가 일본을 비난하는 국수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적 사관이기 때문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