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은 갑의 언어가 될 수 없습니다
‘희생’은 갑의 언어가 될 수 없습니다
  • 안산뉴스
  • 승인 2019.08.2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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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하 안산대 교수

“모든 혁명엔 희생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어느 드라마에 나온 대사지만, 혁명이란 단어를 전체의 성공, 안녕 등의 언어로 대체하면 일상에서 종종 듣게 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집단 활동에 불성실한 학생에게 교사가 하는 말일수도 있고, 조직의 성공을 위해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하는 말일수도 있습니다. 혹은 일사불란한 전체의 질서를 교란하는 개인의 개성이나 자유를 탓하는 순간 사용될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카렌암스트롱이 종교의 기원을 추적하며 쓴 ‘축의 시대’에는 아리아인들의 영성을 설명하며 ‘희생’이란 단어가 사용됩니다. 기원전 1600년에서 900년 사이 발생한 영성에 대한 설명이니, ‘희생’이란 개념이 적용된 초기의 사건, 즉 희생이란 행위의 기원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전통 아리아인의 창조신화에 따르면 식물, 황소, 인간은 모든 생명의 세 원형인데 이들의 죽음에 대한 희생제를 올린 후에야 세상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즉 세 원형은 다른 생물이 살 수 있도록 자기 생명을 내 놓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세 원형의 자기 희생을 통해서야 비로소 존재하게 됩니다. 아리아인의 창조신화를 통해 주목하고 싶은 건 ‘희생’이란 단어는 이처럼 자기를 내어주는 행위의 가치를 기리기 위한 것, 즉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살아남은 자들이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기 위한 결과론적 단어라는 것입니다. 검색창에 ‘희생’이란 단어를 입력하면 독립운동가의 희생, 부모의 희생, 예수의 희생 등이 가장 빈번하게 검색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더 많은 힘을 가진 사람이 더 적은 힘을 가진 사람에게 “모든 혁명엔 희생이 필요한 법” “모든 성공엔 희생이 필요한 법” “조직과 전체의 안녕엔 희생이 필요한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타당할 수 없습니다. 위계적 관계에서 수직으로 낙하하는 희생이란 결과에 대한 현상을 설명하고 기리는 단어가 아니라, 특정 힘과 권력을 위해 개인을 소멸하는 요구나 명령, 그래서 폭력이 되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자가 국가의 성장을 위해 국민의 희생을 말하는 것, 독재자가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개인의 희생을 말하는 것, 자본가가 조직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의 희생을 말하는 것은 ‘희생’이란 단어에 대한 교묘한 전복인 셈입니다. 특히 자신을 자발적으로 내어 준 종교로서의 예수를 비롯한 선지자를 앞세운 희생에 대한 요구는 ‘자발로서의 희생’을 ‘명령으로서의 희생’과 병치한다는 점에서 ‘희생’의 본래 가치를 퇴색하는 시도가 되기도 합니다.

“당신의 희생이 필요합니다”라는 ‘요구의 언어’는 불가능합니다. “당신의 희생이 아프고 절절하게 감사합니다”라는 ‘희생에 대한 감사’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희생’은 갑의 언어가 될 수 없습니다.

“본청 직원 곱하기 12, 하청 직원 곱하기 4. 죽음 값에 대한 차별적 감점”, “삼성 해고노동자 고공농성 78일째에 다시 단식 시작” 실은 이 세계에 무능력하게 절망합니다. 근대화가, 거대해진 자본이, 자본의 탐욕이, 침묵하는 정규직으로서의 평안이, 작은 일상에서 한 개인에게 강요된 희생을 정당화하고 그렇게 누적된 정당화들이 결국 하청업체,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를 양산하는 디딤돌이 됐습니다. 누구도 문제제기 하지 않았던,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드러나지 않았던, 무수한 차별들로 이어진, 어쩌면 선생의, 어쩌면 직장상사의, 그리고 조직의, 정당의, 국가의, 그러니까 갑들의 언어로서 말해진 ‘희생’에도 일말의 책임이 있지 않은가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어떤 무게로도 설명할 수 없고 침묵할 수도 없습니다. 무참함을, 무력함을 느끼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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