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쉬는 날
어쩌다 쉬는 날
  • 안산뉴스
  • 승인 2019.11.2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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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삼 안산청소년재단 대표이사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 이야기 다소의 윤색을 거쳐 계속 이어간다. 시간이 잘 나지도 않지만 어쩌다 날씨 맑은 휴일이면 산에서 내려와 지인들과 어울려 낡은 사우나에 들어간다. 거기서 한가롭게 마실 나온 낯익은 할아버지들과 만나게 되는데 할아버지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말동무가 생겼다고 이야기를 풀어 젖힌다. 재밌기도 하고 외면할 수 없어 이야기를 장시간 들어드리고 땀방울이 줄줄 흐르는 습식 사우나 방까지 따라 들어가 뜨거워도 모래시계로 최소 5분은 경청해드려야 한다.

사우나 속 할배들, 되기 싫어도 우리도 언젠가는 저리 늙어 힘없는 노인이 될 것인바 마른 수세미처럼 주글주글하고 움푹 파진 대퇴부와 대나무 매듭같이 뼈마디가 툭 불거진 등허리를 길게 쳐다본다. 젊은 날에는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이제는 배설 이외에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할 것으로 추정되는 너무나 축 쳐진 사타구니를 곁눈질로 재빨리 쳐다보고 그 참에 내 하복부도 한번 들여다본다.

할배들이나 아제들의 ‘사우나100분토론’은 쉴 사이가 없어서 시사·경제·부동산 이야기를 듣자면 종편 패널 뺨때리는 분석력이 혀를 내두르게 하고 뇌를 채워주어서 사우나는 한가로운 휴일을 결코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는 법이 없다.

그들의 뉴스는 조국에 이어 어려워진 경제 상황과, 동네부동산, 고혈압, 지소미아, 왕년에 청계천에서 고생했던 이야기 등 장르 불문 종횡무진이다. 한 때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이 대세였다. 서거 10년이 지난 노무현 전 대통령 이야기도 마치 옆에서 본듯 말하고 종종 박근혜와 이명박 이야기를 뒤섞어 놓기도 하는데 누가 감옥에 있고 누가 병원에 누워 있는지 헷갈리게 한다.

할아버지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 이야기를 할 때 기어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끌어들인다. 박정희에게서 힘을 받으면 예상대로 자유당 이승만까지 거슬러 올라가 ‘쌍팔년도 분위기’를 만든다. 자유당 때의 ‘국가대표급 주먹’ 이정재는 관심 있는 사람은 알지만 일본 깡패 40명을 눕혔다는 전설의 주먹 시라소니 무용담까지 들려주어 야사의 상식 반경을 넓혀준다. 알아두면 쓸 곳 있는 신기한 알쓸신잡이 풍부한 할배들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자신들이 실제 겪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이기도 하고 창작한 이야기도 있지만 중요하지 않다. 수회 들었어도 들을 때마다 각색되고 부풀려져서 다음 편을 기다리게 만든다. 재밌게 들어주고 맥반석 계란까지 까드리면서 맞장구를 쳐드리자 할배들은 너무 좋아한다. 생각건대 우리는 너무 느자구 있는 젊은이들이다. 그런 할아버지들이 몇 달 전부터 한분 두 분 보이지 않더니 최근에는 아무도 안 보이는데 대한민국 인구 감소는 사우나에서도 확인된다. 나도 사우나 오는 횟수가 줄어들 것 같다.

다른 시답지 않는 이야기 하나 붙인다. 성안고 사거리에 흑염소탕 집이 있다. 기가 막히다는 소문을 듣고 갔는데 기가 막힐 정도는 아니어도 재글재글 끓는 흑염소 전골이 구수해서 자주 들른다. 둬 사람이 함께 가서 식사를 겸한 반주 한 잔 하기 딱 좋은 곳이다. 일요일 오후 아내, 아들과 함께 트레이닝 복 차림에 운동화 질질 끌고 들어가면 한 동안 소식 없이 지내던 지인을 만나기도 하고 상가에서 인테리어 가게를 하는 아파트 주민을 만나기도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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