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전 걸치기 캠페인 유감
문전 걸치기 캠페인 유감
  • 안산뉴스
  • 승인 2019.11.20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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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석 안산시독서동아리네트워크 회장

캘리포니아의 부자촌에서 한 가지 실험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부자촌의 주인들에게 그들의 정원 앞뜰에 모양은 볼품없지만 엄청나게 큰 안전운전 메시지가 적힌 공공 선간판을 세울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짐작하듯 그것에 대한 승낙률은 매우 미미하였다. 하지만 실험 방법을 약간 바꾸자 무려 76%의 주인들에게서 승낙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처럼 높은 승낙률을 얻을 수 있었던 방법은 뜻밖에 간단하였다. 그것은 주인들에게 선간판을 세울 수 있도록 해달라는 제안 이전에 먼저 그들의 차에 안전운전 메시지가 적힌 조그마한 스티커를 부착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차에다가 스티커 붙이는 것은 하찮은 일이었기에 대부분의 사람이 그에 대해 동의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다시 그들을 찾아가 그들의 앞뜰에 안전운전 선간판을 세우자고 했을 때 많은 집주인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처음의 부탁은 사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들은 자신을 안전운전에 대한 의식을 갖춘 사람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이후에 정원에 선간판을 세우자는 요청이 들어오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승낙하게 된 것이다.

이 내용은 로버트 차알디니가 저술한 ‘설득의 심리학’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실험을 수행했던 연구자는 사소한 요청에 동의하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일단 우리가 작은 요청에 동의하게 되면, 나중에 더욱 큰 요청에도 동의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한다. 게다가 처음의 요청과는 성격이 다른 요청도 쉽게 승낙하게 될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그는 이러한 전략을 ‘작은 약속부터 시작하는 문전 걸치기 기법’이라고 칭했다.

며칠 전 SNS를 검색하던 중 모 단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캠페인 기사를 읽게 되었다.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사회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한 캠페인이었는데 그것에 대해 동의한다면 서명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평소 그 문제에 관해 관심이 있던 터라 큰 망설임 없이 간단한 신상 명세를 적은 후 동의란에 표시하고는 엔터키를 눌렀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며칠 후 낯선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걸어온 것은 바로 그 캠페인을 주도한 단체였다. 상대방은 나에게 먼저 그런 캠페인에 동의한 적이 있는지를 물었고 그렇다고 하자 그에 대해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러면서 왜 그 캠페인에 동의하게 되었는지를 재차 물었다. 이에 나는 내 나름의 이유를 그에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상대방은 다시 한 번 나의 설명에 감탄을 금치 못하더니 이윽고 자신들의 캠페인에 대한 설명과 당위성을 다소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그러더니 마지막으로 후원금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약간 당황하였지만, 차마 그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 사람이 건네주는 계좌 번호를 받아 적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 그 캠페인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캠페인의 후원 요청 거절에 대한 강력한 심리적 방어막으로 작동한 것이다.

즉 나는 전형적인 문전 걸치기 전략에 그대로 말려든 것이었다. 이 일 이후에도 두 차례 정도 무심코 온라인상에서 서명했던 캠페인의 주관 업체로부터 후원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았다.

이처럼 캠페인 서명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후원금을 요청하는 방식이 요즘 시민 단체들이 후원금을 모으는 주된 방식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좀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필자의 경우를 비추어 볼 때 그 이후로는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진 캠페인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선뜻 동참 서명을 하기가 꺼려지기 때문이다.

캠페인을 벌이는 단체들은 나름의 절박한 사정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결국 사회 전체적인 참여 역량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동하게 되어 결국 각 단체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이제는 내가 속한 단체의 후원만을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인하여 시민사회 단체의 전체 파이가 커질 수 있는 더욱 창의적인 후원방식을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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