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하는 청년들
교차하는 청년들
  • 안산뉴스
  • 승인 2018.11.14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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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안산청년네트워크 운영위원

여기 수저론(論)이 있다. 대물림되는 빈부격차에 대한 청년들의 자조다. 수저를 든 청년들이 있다. 어떤 청년의 수저에는 큰 구멍이 나 있다. 어떤 청년은 수저를 드는 행위가 신체에 부합하지 않는다.

어떤 청년은 수저라는 도구가 낯설다. 어떤 청년은 수저를 들 기회가 별로 없었다. 어떤 청년은 수저를 들었다가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청년 남성, 청년 장애인, 청년 이주민, 청년 여성, 청년 성소수자...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비슷한 가난을 공유한다.

빛나는 수저를 든 청년도 가난을 말한다. 가난은 더 이상 어떤 지표나 척도가 아니라 시대적 태도라는 위치를 획득했다. 자기소개서 속의 ‘나’들은 대체로, 그 기준은 각기 다르나, 어려운, 혹은 어려워진 가정형편 속에서도 ‘긍정적’으로 역경을 이겨내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역병처럼 확산하는 실질적 빈곤은 우리의 지갑뿐만 아니라 시간과 정신까지도 좀먹었다. 언제부턴가 청년들은 아프기 시작했다. 청춘이라는 말은 쓸 만한 처방약이 아니었다. 계발서도, 창업도 삶의 질을 올려주진 않았다.

청년들은 벼랑 끝까지 몰린다. 궁지에 몰렸을 때 일타를 가하는 건 동물의 본능이다. 그러나 괴이한 계급 시스템 속에선 무엇이 나를 궁지에 몰리게 하는지 단번에 보이지 않는다. 결국 과녁은 나에게 보이는,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약한 자에게 돌아간다.

생계형 범죄, 혐오 범죄 발생이 증가한다. 가해와 피해의 사이에서 헤매는 청년들은 점점 더 사회의 외곽으로 밀려난다. 모든 걸 포기했다는 그들의 자가진단에 따르면 ‘이번 생은 망했다’. 누군가는 틀어박히고 누군가는 목을 맨다.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 치유를 찾아 헤매는 청년들이 있다. 시간빈곤 속에서 잠깐 동안 전념할 수 있는 짧고 직관적인 치유. 미디어콘텐츠는 점점 레이어가 가벼워지고 도서는 페이지가 짧아진다. 자신의 상황이나 느낌을 표현할 때는 40자 이내 혹은 사진으로 대체한다.

무엇이 우리를 치유할 수 있는가? 현재로선 치료법이 없다. 뒤늦게 정부가 각종 수당, 제도들을 들이대도 본질적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수저를 제대로 들 수 없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공통의 아픔은 있다. 그러나 감기에 걸려도 각자의 약이 다르듯이, 우리는 가난과 아픔을 공유하지만 각자에게 처방약이 필요하다.

청년을 한 덩어리로 보는 관점이 아닌 청년 당사자들의 다양성을 직시하는 관점이 절실하다. 싸잡기식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밀려나는 청년은 청년이 아닌 것인가? 수저뿐만 아니라 수저를 드는 손과 그 주변으로 형성되는 권력과 계급에 대해, 권력의 교차성을 우리는 봐야한다. 그리고 말해야 한다. 여기, 서로 다른 청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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