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답잖은 옛날 이야기
취업전야
시답잖은 옛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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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산뉴스
  • 승인 2020.03.18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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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삼 안산청소년재단 대표이사

우리가 취업준비를 하던 때는 80년대 초중반으로서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다. 이른바 신군부 시절이라 대학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껏 놀지도 못하고 충분히 공부를 해보지도 못한 어중간한 청춘이 우리 세대다. 술좌석에서나 할 수 있는 옛날이야기를 끄집어내느냐는 비난을 무릅쓰고 몇 자 적는다.

당시 학내외에서는 연일 데모가 벌어졌고 정국은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안개 정국이었다. 정부는 철권통치를 강행했고 앞서거니 뒷서거니로 김영삼 총재의 단식이나 미문화원 방화사건 같은 것이 일어난 때가 그 무렵이었다.

그러니 학생들은 이 어지러운 시국에서 취업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걱정이 태산 같았고 따라서 취업에 있어서 그 이전 선배들처럼 느긋하게 졸업 학년 가을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일치감치 한 3학년 여름쯤부터 취업준비에 돌입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밀려오는 진로 고민, 내가 당시 설계했던 진로 로드맵은 이랬다. 첫째 취업이냐 진학이냐를 결정하자, 둘째 취업이면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 공기업이냐, 셋째 진학이면 국내냐 해외냐, 넷째 직종은 제조업이냐 서비스업이냐 또 관리직이냐 생산직이냐를 순차적으로 생각하자 뭐 이런 것이었다. 어골도(魚骨圖, Fish Bone Diagram) 방식으로 직직 그어가며 얼기설기 디자인을 했지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내린 결론은 ‘대기업-제조업-생산직’이었다. 특별히 ‘제조업-생산직’을 강조한 것은 공과대학 졸업생은 공장으로 가야 높은 사람 된다는 어른들 말씀 때문이었다.

그때 어른들은 말했다. 부자가 됐든 말단 참봉이 됐든 세상의 지혜는 ‘직장’ 경험에서 나오고 ‘직장’이라 함은 ‘공장’과 ‘장사’인데 그 중에 으뜸은 ‘공장이니라’라고. 그러면서 공장에서 조직생활 해보고, 시장판에서 물건을 팔아본 사람이야말로 세상 이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다(정말 이렇게 말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아무튼 그런 과정으로 첫 직장을 선택했는데 따라서 처음부터 딱 어느 곳으로 들어가겠다고 맞춤형으로 준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어골도에서 생각했던 보좌관은 그 뒤로도 상당 기간 유보되어야 했다.

그런데 목표를 세웠으면 공부를 해야 했는데 니기미 좀처럼 책을 잡지 못했다는 거다. 다들 새벽부터 도서관에 처박혀 토플이나 영어 회화에 매달렸지만 당최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그러면 뭘 하고 쏘다녔느냐. 수업이 파하면 꾸역꾸역 굴다리밑 파전집에 모여들어가 학생증 맡겨놓고, 졸업 후 무역회사를 설립하는 심화섭, LG를 거쳐 지금은 배재대 교수로 있는 손주영 등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고 놀았다(우린 지금도 만난다).

파전집에 들어가서는 파전에 막걸리를 놓고 잡담을 시작하는데 잡담은 뭐가 있겠는가. 일단 처음에는 여학생들 이야기도 하고 교수님들 흉도 보고 샛터로 엠티 가자는 이야기 등 사소하게 시작하여 시국 문제로 화제를 돌린다.

서울의 봄이 어떻고 정승화가 어떻고 등등 핏대를 내다가 느닷없이 개똥철학으로 옮겨가 세상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하는 심각한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막걸리 잔을 부딪친다. 이야기판이 커지면 커진 만큼 막걸리 잔도 여기 저기 내뒹굴게 된다.

막걸리는 주전자에 담고 굵은 대파를 듬성듬성 썰어 석화에다 척척 버무려 부친 보름달만한 밀가루파전을 시키는데 파전은 가난하고 배고팠던 우리들이 즐겨 먹던 안주이자 군것질이며 저녁식사였다. 그곳의 찌그러진 주전자는 벗겨지다 만 노란색에 땟국이 꾀제제 흘렀고 주인아주머니 웃음소리는 너무 정겨웠다. 찾아가지 않은 학생증이 수북이 쌓여 있던 그 파전집도 이제 기억 속에만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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