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이의 잔치
심청이의 잔치
  • 안산뉴스
  • 승인 2020.03.1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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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석 안산시독서동아리네트워크 회장

‘심청전’에서 심 봉사의 심(沈)은 ‘침’으로도 읽히며 ‘가라앉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심 봉사는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하다’. 아내는 죽었고, 아기는 핏덩이며 구걸 외에는 먹고 살 방도가 없다. 암울하기만 하다.

이처럼 무거운 분위기에서 시작한 서사는 갈수록 점점 더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져 가라앉는 것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가라앉았던 심청은 연꽃에 실려 극적으로 부활한다. 연꽃은 흙과 물과 공기, 지하와 지상과 천상에 두루 깊이 뿌리 내리는 강인한 생명력과 아름다움의 결정체이다.

신화학자들은 이를 자기 안에 억눌렸던 생명의 여성성이 마음껏 발휘되는 완전한 여성의 탄생으로 해석한다. 청이가 왕비가 되는 것도 이런 여성이 성취하는 최상의 힘과 아름다움의 표현이다. 심청은 왕비가 되어 맹인 잔치를 열게 된다. 잔치란 삶의 풍요함을 나누고 감사하고 축복하는 의례이다. 심청전의 처음 분위기였던 암울함, 가난함, 어두움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이미지이다. 이 잔치에서 심 봉사는 청이를 만나 눈을 뜨게 되며, 이러한 기적은 잔치에 참석했던 모든 맹인에게도 일어나게 된다.

칼 융은 심리학적으로 본래 인간은 누구나 양성의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남성 안에는 여성성을 칭하는 ‘아니마(anima)’가, 여성 안에는 남성성을 칭하는 ‘아니무스(animus)’가 존재하고 있으며, 각자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여성성 혹은 남성성이 적절하게 활성화 되어야만 균형 잡힌 인간이 된다고 보았다. 신화학자 고혜경은 칼 융의 심리 이론을 가지고 ‘심청전’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던지고 있다.

심 봉사는 어느 날 심청을 기다리다 물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마침 그곳을 지나다가 자신을 구해준 스님에게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칠 것을 약속한다. 이에 심청이는 아버지의 약속을 지키고자 자신을 남경 상인에게 삼백 석에 팔아넘긴 뒤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만다.

고혜경은 심 봉사의 무책임한 약속으로 청이가 죽는 이 장면을 남성성에 의해 가차 없이 여성성이 희생되는 것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 심청전은 여성성이 억압된 가부장적인 남성 혹은 남성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성이 얼마나 쉽게 희생될 수 있고 또 취약한지 보여주는 메타포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성성의 성격은 분할하고, 구분하고, 논리적이고, 이분법적인 것임에 비해, 여성성의 성격은 통합하고, 연결하고, 애매함을 허용하고, 역설적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남성성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이며 상대적으로 여성성은 열등한 것으로 치부한다.

이런 사회는 성과를 위한 대립과 경쟁이 주도하는 사회이며 인정은 연약함으로, 공감은 약자의 논리로 치부한다. 오직 너를 밟고 우뚝 선 나의 모습만이 그려지는 사회인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남성성이 활성화된 폭력적인 사회에 살고 있으며, 이런 남성성이 강화된 사회는 결국에는 그 자체의 논리로 파국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남성성이 과하게 표출되는 대표적 의례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선거이다. 선거는 오직 결과로서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행위이다. 따라서 선거에 이기기 위한 온갖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며, 때로는 공공연히 법의 테두리를 넘어 이루어지기도 한다. 즉, 오직 승자만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all or nothing 게임인 것이다.

이런 총선이 바야흐로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언론과 미디어를 비롯해 진영별로 나누어진 국민들은 갈수록 상대방을 향해 극도로 날 선 언어를 쏟아붓는다. 오직 극도의 남성성만이 활성화되어 있으며 통합과 연결의 여성성은 설 곳이 없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의 안위는 뒤로 한 채 대구로 달려가는 의료진과 각지에서 모여드는 구호품들, 소주 회사가 원료인 알코올을 소독제로 변환해 기부하기도 하며 사재기도 없다. 그리고 자발적 사회 격리와 함께 부족한 마스크를 양보하려는 시민들의 몸짓 속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한 통합과 연결의 여성성을 확인하게 된다.

이처럼 코로나 정국에서 보여주는 우리의 따뜻하고 통합된 여성성을 남성성이 지배하는 선거에서 활성화시킬 수는 없는 것인가? 그래서 여성성이 만개한 심청이가 베푼 잔치로 모든 맹인의 눈이 떠진 것처럼 이번 총선을 우리 안의 자부심과 자존감을 고양시키는 잔치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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