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靑出於藍)
청출어람(靑出於藍)
  • 안산뉴스
  • 승인 2020.04.0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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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철 우리동네연구소 퍼즐 협동조합 이사장

중국 춘추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인 순자(荀子)는, 본시 인간의 성품은 악하지만 착해지려거든 인위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원래 착하다는 맹자의 성선설과 반대되는 의미로 후천적 가공을 통해 착해진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동양의 경우 성선설 이후에 성악설이 나온 반면 서양은 성악설이 먼저 등장하는데 인간은 본성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원죄로부터 출발한다.

기독교의 교리이기도 한 이 말로 인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죄를 떠올리고 뉘우치며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을 반복하고 신앙한다. 수천 년 전, 비슷한 시대에 서로의 존재도 모르는 문명에서 이런 사상들이 나온 것도 신기하기만 종교나 철학 안에 닮아 있는 교훈이 담겨 있다는 것도 놀랍다.

순자가 남긴 말 중에 청출어람이 있다. 주로 스승보다 제자가 더 뛰어나다는 뜻으로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성서의 구절과도 맥을 같이 한다. '푸른색은 쪽(藍)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고 하니 쪽을 능가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필자가 마을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은 어디서부터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이 의논할 이웃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보도 별로 없었다. 마을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다 이웃들의 눈에 띄어 칭찬 받거나 격려 받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었고 견제와 뒷담화의 대상이 안 되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길을 일러주는 사람도 없고 도달해야 할 목표 지점도 없었지만 이왕 발을 디뎠으니 가는데 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다른 지역 사례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강연이나 사례를 찾아 인터넷을 헤맸고 자료를 구해 고시 공부하듯 매달려 탐독했다.

선진지를 찾고 벤치마킹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잘되는 공동체의 특징이 열정적인 리더와 죽이 잘 맞는 주민들이 조화롭게 활동한다는 것과, 밀고 끌어주는 관계와 더불어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라는 것도 알게 됐다. 이론과 실제를 오가며 하나 둘 만나는 이웃들과 일을 벌이는 즐거움이 커졌고 그 결실로 소통과 화합의 결정체인 일등동네주민협의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동네 안에 활동하는 모든 단체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여 사업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처음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랫동안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에서만 활동하다가 다른 단체와 의견을 조율하고 양보해서 만들어내는 마을 사업은 결과 못지않게 과정 또한 소중했다. 그렇게 협의회라는 좋은 틀을 만들어 성과를 내다보니 이내 전국에 알려졌고 실질적으로 모든 단체가 화합하고 성과를 내는, 과거에 없던 좋은 사례가 되었다.

인천 연수구에는 송도2동이 있다. 갯벌을 매립해 만들어진 동네로 1994년에 매립을 시작하여 2012년에 분동했으니 이제 갓 학교에 입학한 어린이 나이다. 다행이 지역마다 마을마다 존재한다는 원주민 텃새는 적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국제도시로 개발되어 주거 환경과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는 반면, 터를 잡아야 하는 주민들은 객지이고 낮선 환경에 적응하며 정착했을 거라 짐작된다.

그런데 마을 만들기도 버거웠을 짧은 연륜임에도 주민자치회에서 활동하는 위원들과 마을에 관심 있는 주민들이 힘을 모아 전국 최우수 모델이 되는 사례를 만들어냈다. 아무 것도 없었지만 자치의 길을 찾으려고 몸부림 쳤다고 한다.

자치는 아래로부터 시작하는 풀뿌리 민주주의고 간절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주민이 모이고 활동하는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벤치마킹을 다니던 중 행정복지센터 프로그램 120개를 운영하는 곳을 다녀오게 되었고 연구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거치며 150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운영하는 프로그램 수익으로 마을을 위해 일하는 직원을 4명이나 고용해 주민자치를 견인하는 든든한 임무도 수행하고 있다. 송도2동의 사례에서 보듯 방법을 찾고 목표를 정해 매진하는 과정이 정말 멋지고 존경스럽다. 바라기는, 등대처럼 빛나는 선진지의 모습을 보고 자치의 길을 찾는 전국의 마을들이 청출어람이 되어 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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