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안산시문화유산이야기(23)
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안산시문화유산이야기(23)
  • 안산뉴스
  • 승인 2020.05.1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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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선생 묘(李瀷 先生 墓)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 선생(1681(숙종 7)~1763(영조 39))을 모신 유택으로 안산시 상록구 일동 555의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고 1976년 10월 13일 경기도 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됐다.

묘역의 석물로는 묘비(墓碑)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묘비문은 번암 채제공이 지은 것이다.

봉분의 규모는 600×550×220cm이다. 두향(頭向)은 북향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묘소로 오르는 길은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묘소 오른쪽에는 사당인 첨성사(瞻星祠)와 재실 경호재(景湖齋)가 있다. 묘 맞은편 길 건너는 2002년 5월에 세워진 성호기념관이 있다.

이익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 성호(星湖)이다. 부친 이하진(李夏鎭)이 1681년(숙종 7)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갔을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이듬해 부친을 여의고, 선영(先塋)이 있는 안산으로 돌아왔으나, 10세가 되어서도 글을 배울 수 없을 만큼 병약했다. 형 이잠(李潛)에게 글을 배웠고 1705년(숙종 31) 증광시(增廣試)에 응시하였으나, 시험장에서의 녹명(錄名)이 격식에 맞지 않아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 다음해 둘째 형 이잠이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는 소를 올려 역적으로 옥사하게 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안산 첨성촌(瞻星村, 현 상록구 일동)에 거주하며 오직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몰두했다.

처음 성리학(性理學)에서 출발했으나 실학파의 시조(始祖) 유형원(柳馨遠)의 학풍을 계승해 실학의 대가가 됐다. 그의 학문 영역은 천문·지리·율산(律算)·의학(醫學)에 이르기까지 능통했고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실증적이고도 비판적인 태도로 학문에 접근해 사회 현실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모든 학문을 사회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여겼다.

정치, 지방, 재정, 경제, 과거제, 학제, 병제, 관제 등 여러 현안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고 대안을 피력했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성호사설’은 그의 현실비판 정신과 사상을 담은 것이다. ‘성호사설’, ‘ 성호문집’, ‘곽우록’ 등 저서를 남겼고 1763년(영조 39)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는 직계 후손이 없어 방치됐으나 1967년 5월 성호 이익추모회에 의해 묘역이 정비되고 묘비와 향로석, 망주석 등이 새로이 세워졌다.

매년 5월 안산문화원 주관으로 성호문화제가 열리고 있고 가을에는 성호학회에서 주관하는 성호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다.

(참고문헌)

‘내고장 안산’(내고장안산편찬위원회, 1990)

‘안산시사’(안산시사편찬위원회 1999)

‘디지털안산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안산시사’(안산시사편찬위원회 2011)

‘안산 아름다운 향토문화’(안산시 2019)

daum cafe-안산의 역사와 문화유산

(http://cafe.daum.net/ansan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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