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언어가 사라진 자리
마음의 언어가 사라진 자리
  • 안산뉴스
  • 승인 2018.11.28 10: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명하

작가 ‘파커파머’는 참전 군인의 정서적 내상을 의미하는 용어를 살펴보면 인간의 마음이 관계와 일상에서 어떻게 점진적으로 소외되고 배제되는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남북전쟁 후에는 군인들의 마음, 1차세계대전 후에는 포탄충격, 2차세계대전에서는 전쟁피로, 그리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는 각각 군사적 효능의 소진과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란 이름으로 참전 병사들이 겪는 심리적 정황을 나타냈습니다.

다섯 개의 단어는 모두 전쟁에서 다친 군인들을 지칭하지만 인간이 경험한 실존적 고통은 전문화된 용어 아래에서 점차 은폐되고 있습니다. 군사적 효능의 소진이란 단어에서는 군인의 몫을 더 이상 해낼 수 없는 무능이 읽히고,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란 단어에서는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서의 무력이 읽힙니다.

군사적 효능의 소진이나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란 단어에서는 그들이 전쟁에서 겪은 인간과 개별존재로써의 상실, 그로인한 공포, 불안, 분노, 좌절 등의 경험을 읽기 어렵습니다. 감정이 사라진 채 진단하고 선언하는 단어 속에서는 한 인간을 온전히 감각하기 어려워집니다.

“조선일보 손녀 폭언 공개에 네티즌 분노” 지난 주 이슈가 된 사건에 대한 한 일간지 기사 제목입니다. 대기업 총수의 손녀가 운전기사에게 한 막말이 문제가 됐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50대 후반의 어른에게 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말들이었습니다.

기사를 접한 네티즌의 분노는 아이의 부모에게 향했고, 결국 부모는 대표이사직에서 사임했습니다. 이후로도 사건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등장했지만 갑질, 계급질이란 기업의 횡포, 그리고 이러한 횡포의 대물림으로 의견이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발달심리학자인 브론펜브레너는 인간의 발달에 영향을 주는 환경을 5가지 체계로 설명합니다. 부모나 형제자매, 유치원과 학교 등 아이가 직접 대면하며 영향받는 미시체계, 부모의 직장 환경, 대중매체 등 아이가 직접 대면하지는 않지만 미시체계에 영향을 줌으로써 간접적으로 영향 받게 되는 외체계, 미시체계나 외체계의 규범을 형성해 가는 문화적 환경인 거시체계, 그리고 미시체계 간의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중간체계와 한 개인의 삶에서 나타나는 사건으로서의 연대체계가 그것입니다.

그의 이론대로라면,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할아버지뻘 되는 어른에게 한 막말은 갑질이나 계급질을 대물림하는 부모로부터 기인한 것, 즉 미시체계에 의한 영향으로만 책임을 돌리기에는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경향이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단순화의 폭력성입니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면 선과 악으로 대상이 명확하게 구획되고, 악으로 선언된 대상에게는 폭력에 가까운 언어적 비난이 쏟아집니다. 마치 좀 더 거친 언어로 상황을 판단하고 감정을 표현할수록 면죄부가 주어지는 양 말하고 행동합니다.

언어적 비난에 사용되는 단어들은 한 개인의 삶이나 역사에 대한 존중마저 사라진 원색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패턴처럼 대중매체를 통해 반복되는 현상이고, 이러한 대중매체에 대한 일상적 노출은 평범한 관계에서도 유사한 패턴을 만들어 냅니다.

내 앞에 선 이가 감정으로 상처받고 주변의 지지에 의해 살아갈 수 있는 인간 존재임을 잃어버린 언어들, 비하나 폄하, 혹은 은유일지라도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는 언어들이 언젠가부터 우리의 소통 대부분을 차지한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어 속에 인간을 존중하지 못하는 단어들이 전문적 용어라는 이름으로, 악을 단죄하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언젠가부터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영자(현 정권에 대한 지지율 하락을 이십대, 영남, 자영업자의 지지철회로 설명한 단어), 젠트리피게이션(낙후된 지역이 활성화되며 저소득측 원주민이 소외되고 배제되는 현상) 등의 용어에서부터 애자(상대의 행동이나 특성을 비판하는 단어), 비리유치원이란 단어까지... 한 개인의 고유한 역사와 존엄이 사라진 단어들이, 공감이 사라진 날선 언어의 일상화가 오늘의 크고 작은 공간과 관계를 설명하는 실마리 아닐까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