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정 만수르’가 아니다.
나는 ‘열정 만수르’가 아니다.
  • 안산뉴스
  • 승인 2020.06.17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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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욱 안산관광두레PD

나는 나의 한계에 대해 잘 모른다. 이게 무슨 ‘열정 만수르’와 같은 소리인가 싶겠지만 나로선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이다. 유노윤호처럼 열정과 에너지가 넘쳐서 한계 이상의 노력을 통해 능력을 발휘하면 참 좋겠다.

하지만 난 이따금 내 한계를 모르고 일을 벌이다가 기절해버리곤 한다. 정말 말 그대로 기절해버린다. 다음날 계획을 열심히 세워놓고 잠자리에 들지만 알람도, 전화도 듣지 못한 채 골골대다가 오후 늦게까지 앓아 누워버리는 참사가 매달 한두 번씩 발생하곤 한다.

그리고 바로 어제가 딱 그랬다. 주중에 미쳐 끝내지 못한 일을 오전에 끝내놓고 교회에 가야했지만 눈을 떴을 땐 이미 하루가 다 지난 오후 4시였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자괴감... 미쳐 끝내지 못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새벽 알람을 맞춰놓고 그렇게 또 하루를 마무리했다.

남들은 청소년기에 사춘기를 맞이하며 나 자신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지만 난 서른두 살이 되고나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도 혼자 나를 조명하는 깊은 성찰을 통해서가 아닌 데이터를 통해서.

얼마 전 ‘청년 마음치유 워크숍’을 통해 에니어그램 검사를 받게 되었다. 요즘이야 인터넷에서 MBTI, 다중지능검사, 에니어그램 등을 손쉽게 찾아 간편하게 해볼 수 있지만 정식 검사를 통한 전문가의 상세한 분석을 받고나니 확실히 가볍게 접한 인터넷 검사와는 수준이 달랐다. 가장 눈에 띈 단어는 ‘개혁가’, ‘완벽주의자’였다.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완벽하지 못함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며 완전해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끊임없이 일, 시간, 사람 등에 절대적 기준을 부여한다고 한다. 나름 삶에 여유와 이따금 만끽하는 적당한 게으름, 사람들에 대한 관대함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여겨왔는데 데이터를 통해 드러난 내 모습은 조금은 다른 사람이었다.

물론 내 스스로 여긴 여유로움과 관대함이 틀린 건 아니지만 모든 유형을 놓고 봤을 땐 타인의 3배 이상의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니 평소 일을 무리하게 벌여놓곤 내 안의 스트레스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다 한계에 도달해 기절해버리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지 싶다.

지난 주 한 술자리에서 옛 동료가 내게 ‘가장 좋았던 여행’이 언제였냐고 물은 적이 있다. 곰곰이 생각하던 중 베트남 다낭의 해변가에서 누워 쉰 시간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수많은 여행지와 그 여행지에서 보낸 시간들 중 하필 다낭의 해변이 떠오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 내게 여행 스타일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마다 난 거의 대부분 사람의 때와 흔적이 깊이 묻어있는 공간을 오랫동안 거닐며 눈에 담는 것이라 답하곤 했다.

이 또한 끊임없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걷는 행동을 동반한다. 그런데 가장 좋았던 여행의 기억이 다낭 시내를 걸으며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아닌 아무것도 안한 채 해변에 누워 지낸 시간이라니. 가만 생각해보면 그 시간이 가장 좋았던 기억으로 남은 건 무언가를 해서가 아닌 아무것도 안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도 별도 없는 해안가에서 아무 생각 없이 넓은 바다만 바라보며 3시간을 걸터앉아만 있었던 그 시간동안 나는 어쩌면 내 인생 처음으로 완전한 해방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나를 옭아맸던, 그러나 누가 만들어준 것이 아닌 내 스스로 세운 기준과 의무에서 온전히 해방된 그 시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다 비워냈을 때 비로소 나의 존재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새로운 한주를 시작하는 지금, 이번 한 주는 최대한 약속을 잡지 않으리라, 여가시간에도 무언가를 하려고 하거나 채우려고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캘린더에 이미 꽉 차버린 일정을 보는 순간 한숨짓게 된다. 쉼이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역설적으로 의지적 노력을 해야만 쉴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잡힌 일정이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이번 한 주는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높은 잣대를 들이밀고 열정을 강요하지 않길 약속한다.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주량을 알고 그 주량만큼 잘 즐기는 사람이듯 일을 잘하는 사람 또한 자신의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사람일 것이다. 난 ‘열정 만수르’가 아니다. 이젠 내 한계를 인정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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