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눈썹(眉) 변천사
수필- 눈썹(眉) 변천사
  • 안산뉴스
  • 승인 2018.11.28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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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건

“신이 듣기로 안방에서 일어나는 부부의 일은 눈썹 그려주는 정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臣聞閨房之內 夫婦之私 有過於畵眉者).” -『漢書』 「趙尹韓張兩王傳」 ‘張敞’-

한 무제(漢 武帝) 때 현 서울시장 격인 경조윤(京兆尹)을 지낸 장창(張敞)은 부인에게 직접 눈썹을 그려 주었다. 장창이 자기 부인의 눈 화장을 해줬다는 사실이 황제에게까지 보고되었다. 황제가 힐문(詰問)하자 그가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부부사이는 눈썹 그려주는 일 따윈 대수롭지 않은 것이니 아무리 황제라도 간여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황제가 그의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여겨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남녀 간의 사랑이나, 곱고 예쁜 여자를 일컬어 ‘京兆畵眉(경조화미)’ ‘畵眉之樂(화미지락)’이라 한다.

화장에서 눈썹은 포인터다. 눈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이다. 눈썹 없는 얼굴은 상상하기도 싫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급박한 상황을 ‘눈썹이 타 들어갈 정도 焦眉之急(초미지급)’라 표현했을까? ‘아미(蛾眉:나방의 눈썹)’는 미인을 말한다. ‘晧齒蛾眉(호치아미)’는 흰 치아와 나방의 눈썹이고, ‘螓首蛾眉(진수아미)’는 매미의 이마에 나방의 눈썹으로 모두 미인을 형용한다.

衆女嫉余之蛾眉兮 謠諑謂余以善淫

뭇 여인들은 내 아름다움을 질투하여, 나를 음란한 짓 잘한다고 헐뜯누나. -『楚辭ㆍ離騷』-

洛陽閨閣夜何央 蛾眉嬋娟斷人腸

낙양 규방에 밤은 몹시도 깊은데, 아름다운 미인이 사람의 간장을 끊네. -王適 ‘江上有懷’-

房孺復(방유복ㆍ唐)의 아내 최씨(崔氏)는 질투가 심하여 여비(女婢)가 화장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들의 눈썹을 깎고 푸른색을 칠해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눈썹은 질투를 뜻하니 눈썹이 얼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여인들의 눈썹화장은 오랜 전통이 있다. 춘추전국시대 때부터 부녀자들은 자신의 눈썹을 짙게 그렸다. 秦(진)나라 때는 얼굴은 붉게 하고 눈썹은 푸르게 하는 화장이 유행하였다. 漢나라 때는 단순히 눈썹을 칠하는 것을 넘어서 깍아 내리고 그 자리에 검게 칠하는 화장법이 인기였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남편을 받드는 전통은 梁鴻(양홍 後漢)의 부인 孟光(맹광)의 역할이 컸다. 감히 남편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밥상을 눈썹 높이만큼 들어올리는 ‘擧案齊眉(거안제미)’는 남편 공경의 대명사가 되었다. 또한 馬氏(마씨 蜀) 다섯 형제 중에 눈썹에 흰 털이 난 馬良(마량)이 가장 뛰어났다. 그 후로 ‘白眉’는 출중한 사람을 가리킨다. 지금도 흰 눈썹은 신선 내지 도인을 연상시킨다. 이렇듯 눈썹은 역사에서 적잖은 비중을 지녔다. 우리에게 다산(茶山)이란 호로 알려진 丁若鏞(정약용:1762~1836)의 어린 시절 호는 ‘三眉子(삼미자)’였다. 그는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았으나 다행히 잘 아물어서 흉터가 거의 아물었는데 오직 오른쪽 눈썹 위가 세 갈래로 나뉘어져 붙여진 호칭이다.

‘속눈썹’을 한자로 ‘睫(첩)’이라 한다. 속눈썹은 눈에서 가장 가까이 있지만 자신은 볼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의 눈이란 백보 밖은 잘 보면서도 자신의 속눈썹은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能見百步之外 而不能自見其睫)” -『韓非子ㆍ喩老』-

“가는 털처럼 작은 것도 보지만, 자기의 속눈썹은 못 본다(目見毫末 不見其睫)” -『史記』 ‘越世家’-

즉 상대의 단점은 잘 보면서 자신의 단점에는 어둡다는 뜻이니 속눈썹의 역할이 독특하다. 현대의 박준 시인(1983~)은 ‘눈썹(1987)’에서 “아버지는 그날 저녁 엄마가 지리산을 그리고 왔다며 밥상을 엎으셨다”라고 하여 눈썹 화장을 지리산에 비유했다. 험준한 설악산 대신 완만한 능선의 지리산 말이다. 그나마 이름 난 산에 비유했으니 화장이 잘 된 것 같은데 밥상을 엎어서니 같은 남자지만 그 속내를 알 수 없다.

燕巖 朴趾源(연암 박지원:1737~1805)은 43세 때 죽은 누나를 위해 글을 남겼다. 누나가 시집갈 때 연암은 여덟 살 응석받이였다. 이후 28년이 지난 후 누나의 부음을 듣고 당시의 풍경이 떠올랐다.

“아, 슬프다! 누님이 갓 시집가서 새벽에 단장하던 일이 어제 런 듯하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응석스럽게 누워 말처럼 뒹굴면서 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어 더듬거리며 정중하게 말을 했더니, 누님이 그만 수줍어서 빗을 떨어뜨려 내 이마를 건드렸다. 나는 성을 내어 울며 먹물을 분가루에 섞고 거울에 침을 뱉어 댔다. 누님은 옥압(玉鴨)과 금봉(金蜂)을 꺼내 주며 울음을 그치도록 달래었는데, 그때로부터 지금 스물여덟 해가 되었구나!”

(嗟乎 姊氏新嫁 曉粧如昨日 余時方八歲 嬌臥馬效婿語 口吃鄭重姊氏羞 墮梳觸額 余怒啼 以墨和粉 以唾漫鏡 姊氏出玉鴨金蜂 賂我止啼 至今二十八年矣)

연암은 누나를 떠나보내면서 마지막 누나의 흔적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때에 그 잔영(殘影)을 붙들고 싶은 나머지 주변의 자연이 마치 누나의 모습처럼 보였던 것이다.

“강가에 말을 멈추어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휘날리고 돛 그림자가 너울거리다가, 기슭을 돌아가고 나무에 가리게 되자 다시는 보이지 않는데, 강가의 먼 산들은 검푸르러 쪽 찐 머리 같고, 강물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고운 눈썹 같았다.”

(立馬江上 遙見丹旐 翩然檣影 逶迤至岸 轉樹隱不可復見 而江上遙山 黛綠如鬟 江光如鏡 曉月如眉)

연암의 눈에 비친 새벽달은 누나의 고운 눈썹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처럼 문학 작품의 탄생은 평범한 일상에선 잘 보이질 않는다. 연암은 28년 만에 만나는 누나가 싸늘한 시신으로 맞닥뜨렸을 때 주변의 모습은 온통 누나의 형상이었으리라.

눈썹은 멀리 거슬러 가면 나방에서 연암을 거쳐 박준에 이르기까지 초승달에서 지리산으로 변천을 거듭했다. 박준 시인은 나방과 초승달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작가 프로필

-한반도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저서:안산의 진면목을 찾아서, 독수리의 비상(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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