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여성을 말하기 이전에
청년여성을 말하기 이전에
  • 안산뉴스
  • 승인 2018.12.1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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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안산청년네트워크 운영위원

‘청년’은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가? 사회문제를 논할 때, 여성의 문제와 청년의 문제는 분리되어 다뤄지곤 한다. 청년문제의 담론은 청년이라는 세대를 통과하고 있는 이들이 직면하는 문제에 대해 다루는 것이 중심인데, 그것이 공통적 문제이냐, 아니냐가 현 담론의 산입기준일 것이다.

그러나 청년문제에 공통성을 대입하는 수식은 담론을 한없이 좁게 만든다. ‘성별, 장애, 인종 등을 넘어선 모든 청년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란 결국 사회의 디폴트값에 해당하는 청년인 ‘비장애인 비성소수자 비이주민 남성청년’의 문제로 대표될 뿐이며 그렇게 획득된 청년 대표성은 청년을 하나의 기호로, 개념화 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에 딱 맞는 시각적 이미지가 있다. 우리가 남자화장실 앞이나, 횡단보도의 신호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모양’ 픽토그램(정상성)이 그것이다. ‘공통적 청년문제’에 국한하여 다룬다는 것은 살아있는 청년이 아닌 그 픽토그램을 앞에 두고 논의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결국 청년담론에는 당사자성도 삭제되고 실체가 없는, 청년이라 이름 붙여진 개념을 붙들고 공허한 쇼를 하는 행위만 남는다.

사람이 세대를 통과하는 분기를 일반적으로 유년, 청소년, 청년, 장년, 노년으로 나누곤 하지만 청년뿐만 아니라 다른 세대분기점의 이름들도 여성을 대표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여성청소년을 뜻하는 ‘청소녀’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고 쓰이겠는가. 당장의 필요에 의해 분화된 단어이지만 이것은 청소년문제에서 여성문제가 교차하는 지점을 도려내어 말하는 방식이며 이는 결국 여성청소년 담론을 더욱 비주류화 시키고 고립되는 방향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크다. 청소년문제에서 여성문제를 계속 크게 외치는 것이 지속가능한 방향성이 아닐까?

청년담론도 마찬가지다. 청년담론에서 여성을 빼놓고 얘기한다는 것은 반쪽짜리 담론에 불과하다. 최근 불거진 채용 성차별 문제에 청년유니온이 함께 대응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채용 성차별 문제의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와 문재인 정부는 무얼 하고 있나? 현재 정부에서는 실효성은 둘째치더라도 청년정책이라는 것들을 내놓고 있기는 하나, 그 중에서 청년여성을 위한 정책은 없을뿐더러 논의테이블마저도 이제야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청년담론에서 여성을 외치기 위한 방법은 청년여성들이 주로 겪는 문제에 집중하고, 그를 사건화하여 의제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의제는 운동의 시발점이며 법제도의 초석이 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청년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다. 청년의 스트레오 타입이 여전히 청년남성으로 대표된다면 청년여성은 계속 변두리에 남을 뿐이다. 이 관점의 변화는 청년여성 당사자들에게도 필요하다. 스스로의 문제는 여성문제이기도 하지만, 청년여성으로서 겪은 문제로 세분화하여 사고하는 것이 세대별 여성문제에 대한 사안이 명료해질 수 있는 시각이 될 것이다. 또한 청년운동의 주체로 여성들이 움직일 수 있는 동기가 되어 청년여성들이 당사자의 목소리를 담론 속에서 더 크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청년여성들은 이미 많은 목소리를 외치고 있다. 그것이 청년운동에 산입되지 않았을 뿐이다. 고용의 문제, 노동의 문제, 주거의 문제, 안전, 건강 등…. 각각 흩어져 있는 사례들이 많다. 이를 하나로 엮어줄 수 있는 것이 의제다. 그리고 발굴된 의제와 목소리를 경청하고 함께 싸워 줄 지지기반이 필요하다. 미투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위드유(Withyou)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담론에서 여성대표성이 보장될 때 납작한 종이인형 같은 픽토그램은 해체되어 그 뒤에 가려져 있던 사람을 위한 정치 실현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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