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 여종승 기자
  • 승인 2018.12.12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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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경 안산시의회 3선 의원

 

주요 프로필

-1965년 전남 신안 출생

-안산시의회 6·7·8대 의원

-시화지구 지속가능발전협의회 위원(현)

-시의회 세월호참사대책특위 위원장(전)

-해남여자중학교 교사(전)

선출직 공직자의 길은 험하다. 유권자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 도전하는 지역구 선출직의 길은 그보다 험난한 가시밭길이다.

하지만 선출직 도전 삼수 만에 의회 입성에 성공한 여성의원이 있다. 박은경(53) 안산시의회 의원이다.

박 의원은 1990년대 초 가족과 자녀양육을 위해 교사직까지 던지고 안산으로 이사를 왔다. 이후 전업주부에서 시어머니와 가족들의 적극 권유와 도움으로 선출직에 도전했다는 박 의원은 출마 당시 여성정치 참여 목소리가 높았던 점도 한몫 했다고 귀띔한다.

도전 삼수로 선출직 공무원이 된 이후 3선 의원의 금자탑을 쌓아올린 박 의원은 현재 8대 시의회 후반기 의장 유력 후보군에 올라있다.

주민 앞에 서기보다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과정을 중시하고 있음은 물론 때를 기다리는 마음가짐으로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는 박 의원을 현장 인터뷰했다.

-안산과의 인연은 어떻게 이뤄졌나.

“안산에 이사 오기 전 목포에서 살았다. 신안에서 태어났지만 사실상 목포에서 자랐다. 교사를 하고 있었다. 결혼하고 남편이 업을 찾아 안산에서 제조업과 건설업 등의 사업을 했다. 당시 분위기가 주말부부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였다.

함께 살아가야 할 남편과 자녀를 위해 교사직과 전업주부의 길 중 선택을 해야 했다. 안산으로 이사 오게 된 계기다. 안산은 호주 캔버라시를 모델로 계획한 도시였기 때문에 매우 정돈이 잘돼 있었다. 개발 단계였기 때문에 가능성과 역동성 있는 도시로 느꼈다.”

-의원 입문 전에는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다.

“말 그대로 전업주부였다. 단체나 사회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목포를 떠나오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었다. 교사직을 내려놓을 때 친정부모가 많이 반대했다.

하지만 주말부부로 살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교사직을 내놓았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여성의 사회활동을 응원하기보다는 자녀 양육의 가치를 더 존중하는 시대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전업 주부보다 교사직분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가치가 더 높이 인정받았겠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가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선출직으로 3선 의원까지 하고 있기 때문에 교사로서의 사회공헌과는 또 다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정치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 특별한 동기는.

“전업주부로 살 때는 정치 지향적이거나 사회활동을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2005년 말부터 선출직 출마를 권유하기 시작했지만 대부분 회의적이고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가족이 깨어 있었다. 특히 시어머니가 제일 적극적으로 권했다. 시어머니께서 가정살림은 내게 맡기고 도전해 보라며 편지글까지 주셨다.

여성정치 참여 요구 목소리가 높아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정당 공천을 받았지만 낙선했다. 당시 출마한 정당 지지도가 7~8%였지만 두 배 이상의 15%를 득표했다. 첫 출마였지만 여성 후보 등장에 대한 새로움과 호기심, 기대 심리가 작용했던 것 같다.

이듬해인 2007년 지역 출신 의원의 중도 사퇴로 야권이 분열된 가운데에서 또 다시 도전하게 됐다. 두 번째 도전에서도 정당지지율을 훨씬 뛰어넘는 27%를 득표했지만 역시 낙선했다. 하지만 당내 관계자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출마 당시 여성의 지역구 당선이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정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선출직에 두 번이나 도전하면서 정당지지율의 두 배에 이르는 득표율을 보였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정당 공천을 받는데 큰 밑받침이 됐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통합하면서 공천받기도 쉽지 않았다. 비례대표 후보를 권유받았지만 지역구 출마를 포기하지 않았다. 두 번의 낙선에서 보여준 득표율이 공천을 받는데 작용했다. 결국 가 번을 받았다. 선출직 도전 재수를 하면서 행복한 낙오자였지만 가족과 자녀들에게 패자의 모습을 더 이상 보여줘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선거운동을 펼쳤다. 선출직 도전 ‘삼수’ 만에 당선됐다.”

-초선 의원 당시 어떤 다짐을 했는지.

“우리 사회는 가부장적 분위기가 오랫동안 지속돼 왔다. 여성이 너무 나서면 ‘나댄다’고 하거나 ‘여자가~’라는 성차별적인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성차별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여성의 섬세한 장점을 살려서 의정활동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시작된 이후 남성 위주의 선출직 풍토 속에서 정치권을 불신하는 민심이 많았던 시절이다. 여성의 강점으로 기존 정치인이 갖지 못한 점을 살리고 싶었다.

선출직 대부분이 당선 후 주민들의 목소리를 소홀히 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선거 과정에서 결과물보다는 주민 목소리를 들어주고 과정을 살피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선 후 주민 앞에 서기보다는 주민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의정활동을 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재선을 거치면서 마음가짐이 달라졌을 텐데.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기 전에는 재선 도전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서지 않았었다. 초선 의원 시절 주민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었는지, 가족들의 마음은 어떨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선 임기가 끝나갈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면서 이유 불문하고 재선 도전 의지를 가졌다. 재선 당선 후 시의회 세월호참사대책특위 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사회적인 절박감과 의무감, 사명감으로 의정활동에 임했다.

안산은 세월호 참사의 최대 피해 지역이다.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청춘들 수백명이 하늘나라로 갔다. 안산의 세월호 참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희생자와 가족에게 미안하고 안타깝다. 의회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민·민 갈등 과정은 마음이 아프다.”

-현재까지 의정활동을 하면서 조례 제정 등 가장 기억에 남는 의정활동은.

“물론 시의회 세월호참사대책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한 것이지만 기초 자치단체가 해결할 사안이 아니라서 한계에 부딪혔다. 현재도 기초의회가 할 수 있는 역할에 한계가 있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의정활동은 사회경제 지원 조례 제정이다. 사회경제 지원 조례를 대표발의하면서 의원연구모임은 물론 사회경제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배웠고 특위 활동 자체도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3선 의원 과정이 쉽지 않다. 현재의 고민은.

“3선으로 오는 동안 선거를 다섯 번이나 치렀다. 3선 의원이 되는 동안 행복한 후보였고 행복한 의원이었지만 함께 해주는 지역 주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활동하고 있다. 3선이 되면서 주민들이 의회 내에서 굵직한 역할을 해달라는 기대심리도 있지만 초심의 마음가짐으로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 특별한 고민보다는 주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의정활동을 하고 싶다.”

-8대 시의회 후반기 의장 후보군이다.

“물은 차면 넘친다. 잔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물을 가져오기 보다는 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의정활동하고 있다. 자리를 염두에 두기 보다는 때를 기다리며 물을 채워 나가겠다.

해와 바람이 나그네의 옷깃을 스치는 것처럼 더디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연스러움을 쫓고 싶다.”

-지역 사회가 높게 평가할만한 당신의 리더십은.

“꽃으로 표현하자면 장미꽃이다. 장미 한 송이, 한 송이는 가시가 있어 만지기가 어렵다. 하지만 멀리서 군락을 이룬 모습은 매우 아름답다.

안개꽃이나 구절초 같은 들꽃들도 마찬가지다. 하찮은 꽃도 무리지어 피어 있으면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두드러짐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힘이다. 누구라도 함께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카리스마가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정치인이라면 군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앞에서 이끄는 시대는 지났다. 군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는 없지만 은근함이 있다. 은근함의 끈기가 유용한 시대다.”

-안산이 발전하기 위해서 꼭 바꿔야 할 것이 있다면.

“안산을 위해 바꿔야 한다는 것보다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 있다. 경제 부분이다. 서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것이 호주머니 사정이다. 돈과 일자리문제다.

안산스마트허브(반월공단)가 죽어가고 있다. 위기의식을 갖고 적극 대응해야 한다. 스마트허브의 몰락은 안산의 도시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큰 고민을 해야 한다. 안산에 살고 있는 인생 선배로서, 부모로서 안산에서 살라고 말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줘야 한다.”

-3선 의정활동을 해오면서 무엇을 느끼고 배웠나.

“초선이나 재선 때와는 또 다른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책임감이 점점 커짐을 실감한다. 담고 가야 하는 부분이 많아진다.

3선으로서 집행부와의 관계나 초선 의원들의 리드 등등, 그 때문에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말을 아끼고 탄력적으로 유연하게 활동하려고 노력한다.

의회가 집행부의 예산 집행을 제대로 챙겨야 시민들의 행복지수를 높여 나갈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더욱 큰 책임감이 뒤따른다.”

-자기 계발을 위해 어떻게 배우는가.

“먼저 주민들로부터 배운다. 현장에 답이 있다. 주민들이 불편해하는 현장을 찾아다니며 직접 설명을 듣다 보면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현장이 바뀌면 이론도 바뀐다는 말이 있다. 모든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생각이다.

많이 보고 듣고 접하면서 전문가 강연도 찾아다니고 관련 정책과 예산 자료를 취합하다 보면 스스로 공부도 하게 된다. 현장에서 일하는 집행부의 실무자에게서 배우기도 한다.”

-시의회 4선 도전도 꿈꾸는지.

“8대 시의회 임기가 이제 반년 정도 흘렀다. 다음 선거를 얘기하기는 아직 이르다. 3선 의원으로서 4년 과정이 중요하다.

현재는 주어진 임기에 충실하려고 노력 중이다. 모든 선택과 결정은 당원과 주민에게 있다. 정치는 답을 미리 정할 수 없다. 굳이 얘기하자면 현시점에서 뭐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100세 시대다. 정치인 이후의 꿈은 무엇인가.

“정치인이 되기 전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고민이 현재진행형이지만 제도권 밖에서 아이들을 캐어하는 봉사를 하고 싶다.

요즘 아이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랐지만 정신적인 부문에서는 풍족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이들 눈높이에서 마음을 감싸주고 안아주고 어루만져 주는 엄마 같은 사랑봉사를 해보고 싶다.” <여종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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