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편지
두 번째 편지
  • 안산뉴스
  • 승인 2018.12.12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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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선 수필가

“동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난다.”는 꿈을 꾸었다며 당신에게 편지를 보냈었지요.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당신이었기에 감언이설(甘言利說)로 꾀었답니다. 내 영혼을 다 팔아서라도 당신을 지켜주고 살갑게 품어준다는 맹세도 했지요. 진심이라 믿으며 내 안에 둥지를 틀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함께 해준 당신입니다.

어느덧 시간이 삼십 년 가까이 흘렀네요. 세월이 지나며 내 마음은 빛이 바랬는지 모릅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것도 아깝던 눈빛이 이제는 무심해졌습니다, 단물이 뚝뚝 떨어지던 사랑의 세레나데는 물거품이 된 꿈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건성건성 이야기를 나누며 남아있는 정이라는 끄나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오늘따라 뒷모습이 유난히 처연해 보이는 당신입니다. 축 늘어진 어깨는 삶의 무게만큼이나 짐 덩이를 올려놓은 것 같아 맘이 무겁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당신과 함께 걸어가야 할지 모릅니다. 나만 늙는 줄 알고 징징거리는 철부지를 당신은 잘도 보듬어 주었지요. 점퍼를 입으면 초라해 보인다고 밝은 옷으로 치장을 해주며 배웅하는 당신입니다. 우습게 보는 이 하나도 없다며 귀찮다는 투정에도 염색약을 골고루 발라주며 빙긋이 웃어주었지요. 어느새 당신의 고운 얼굴에도 밭고랑 같은 굵은 주름이 생겨나고, 새치를 하나 둘 뽑던 머리카락은 하얀 백발로 변해가네요. 차마 고개를 들어 마주 보기도 민망해집니다.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요. 당신이 살고픈 멋진 생을 연출하고 완성하는 시간이 있기는 했는지요.

지나 온 시간 동안 당신을 위해 무엇을 했나 생각합니다. 노을이 지는 석양을 두 손을 꼭 잡고 말없이 바라보는 날은 있었는지, 개울가에 달맞이꽃 하나라도 건네며 웃자고는 했는지, 처지고 헤진 가슴에 따뜻한 위로라도 건넨 적은 있는지, 사랑한다며 목을 매던 시절은 기억이나 하고 살았는지, 흐르는 구름에 마음 한 자락이라도 올려놓을 걸 그랬습니다. 조약돌에 새긴 “사랑해.”라는 다짐도 자주 꺼내 들여다볼 걸 그랬습니다.

어제 저녁 낡은 사진첩을 펼쳐 보았습니다. 빛바랜 사진들 속, 곱게 접힌 당신께 보낸 편지가 꽂혀있네요. 연애시절 마음을 얻어 보려고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편지였습니다. 꽃보다 고운 새초롬한 미소 띤 소녀가 수줍은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뭉클한 것이 먼저 올라와 눈앞을 뽀얀 안개로 덮어 버렸습니다. 저녁을 너무 짜게 먹었나 봅니다. 물을 많이 먹은 까닭에 두 눈에서 샘처럼 물이 쏟아졌습니다.

두 번째 편지를 씁니다. 결혼 전 당신이 타고 오는 버스를 기다리던 정거장은 지루하기는커녕 마냥 설레었습니다. 처갓집에 인사를 간다고 잔뜩 긴장한 내게 살며시 키스해 주던 달콤함을 기억합니다. 그러던 내가 당신과의 약속이란 걸 시작하면서 기대(期待)라는 텅 빈 곳을 만들었습니다, 나만을 위한 행복이라는 바람만 자꾸 커졌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늘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어머니와 같은 사람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내가 먼저 물어야 했고, 더 많이 바라보고 챙겨주어야 했습니다. 하늘을 올려보며 흘리는 눈물의 서러움을 외면했고, 고개 숙여 가슴을 치는 아픔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늦은 후회는 당신을 바라보라 말을 합니다. 목 메이며 당신을 그리워했던 시간으로 돌아가라 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요.”라고 말해 주면 좋겠습니다.

골방이 공연히 차갑지는 않겠지요. 사람 들었던 정이 떠난 줄 모르고 차갑다 탓만 했습니다. 올 겨울엔 장작을 많이 패 놓을게요. 따뜻한 군불이 지펴진 난로에서 그리 늦지 않은 세 번째 편지를 쓰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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