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켓배송’을 로켓의 속도로 날려 보내며
‘로켓배송’을 로켓의 속도로 날려 보내며
  • 안산뉴스
  • 승인 2021.01.26 14: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원석 안산시독서동아리네트워크 회장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에 전시된 시간을 관장하는 신(神)인 카이로스의 조각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내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나를 발견했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내 발에 날개는 최대한 빨리 달려가기 위해서, 내가 든 저울은 기회가 앞에 있을 때 정확히 판단하라는 이유에서, 또한 내가 칼을 들고 있는 이유는 칼같이 결단하라는 이유이다. 나의 이름은 기회이다.’

헬라어로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로 카이로스(Kairos)와 크로노스(Chronos), 두 개가 있다. 크로노스는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단순히 흘러가는 달력의 시간을 말하며 보통 모래시계로 상징된다. 이 이름에서 연대기(chronicle), 시간측정법(chronometry) 등의 단어가 나왔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낫으로 자르고 패권을 차지한 크로노스는 본인 역시 자식들에 의해 밀려날 수 있다는 염려로 자식들이 태어나는 족족 잡아먹어 버리고 만다. 이처럼 모든 것을 삼키는 모습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이 용해되어 버리는 것을 닮았기에 크로노스를 시간의 신으로 상징하게 된 것이다.

반면 카이로스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른바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시간(critical time)을 의미한다. 성경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는 구절이 있는데 이때의 세월이 바로 카이로스이다. 보통 이 구절을 우리는 분초를 아껴 마치 하루가 48시간인 양 생활하라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본래는 ‘기회를 구원하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자신에게 다가온 결정적 기회의 순간을 흘려보내지 말고 그것을 낚아채서 자기 것으로 만들라는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는 아껴야 할 크로노스적인 시간과 낚아채야 할 카이로스적인 두 종류의 시간 모두가 존재한다는 것 일게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한파를 기록했던 지난 11일, 쿠팡물류센터에서 일하던 50대 여성 노동자가 철야노동을 마친 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쿠팡물류센터의 노동자 죽음은 벌써 다섯 번째이다. 당시 기온은 영하 11℃ 전후였지만 작업장은 별도의 난방을 하지 않았고 쿠팡측은 노동자들에게 하루 종일 단지 핫팩 하나만을 지급했을 뿐이었다.

쿠팡은 “화물 차량의 출입과 상품의 입출고가 개방된 공간에서 동시에 이뤄지는 특성 때문에 냉난방 설비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식당, 휴게실, 화장실 등에 난방시설을 설치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작업자들은 휴게실이란 곳이 단지 작업 공간 귀퉁이에 의자 몇 개만 가져다 놓은 것에 불과하며 최소한의 난방 설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고, 심지어 쿠팡은 작업자들이 뜨거운 물도 마시지 못하게 통제했다고도 증언하고 있다.

어디까지가 팩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노동자의 사망 사건이 벌써 여럿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익 우선이라는 자본의 차가운 속성과 함께 이를 실현하기 위해 속도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 택배회사의 작업 공정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즉 전날 주문하면 다음날 아침에 배송 받는 이른바 ‘로켓배송’이 노동자들의 죽음 한 가운데 놓여있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폴 바빌리오는 ‘최악의 정치’에서 속도를 지배하는 자가 공간과 세계를 지배했지만, 한편으로 배의 발명은 난파의 발명이고 비행기의 발명은 추락의 발명이며 전기의 발명은 감전의 발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켓배송의 발명이 ‘노동자의 죽음의 발명’일 것까지는 없지 않겠는가?

‘시간절약’이 절대적 규범이 되어버린 현대에, 우리가 로켓배송을 통해 아낀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렇게 아낀 시간으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였을까? 그런데 그렇게 아낀 우리의 ‘한 줌 시간’이 혹시 누군가의 ‘길고도 소중한 인생의 시간’ 자체를 빼앗은 아니었을까? 이제 좀 늦더라도 우리 같이 살아가자. 기업이 충분한 인력을 확보하고 적합한 복지시설을 구비한다면, 그리고 그로 인한 가격상승을 흔쾌히 소비자가 동의한다면 모를까, 이제는 로켓배송, 이것부터 로켓의 속도로 날려 보내야 할 때가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