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쓰노트(Death Note)
데쓰노트(Death Note)
  • 안산뉴스
  • 승인 2018.12.19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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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석 안산시독서동아리네트웍 회장

책깨나 읽었다는 분들에게 그리스와 관련해서 읽은 작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보통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아’, ‘일리아드’와 함께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소포클레스, 유리피데스, 아이스킬러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엘렉트라’, ‘아가멤논’ 등을 답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스 사람들은 희극보다는 비극을 더 좋아하였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작품 ‘시학’에서 사람들이 비극을 보는 이유를 카타르시스를 일으키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카타르시스는 그리스어로 깨끗해진다, 정돈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주인공의 비참한 운명은 관중의 마음에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을 유발시키게 되고 그 과정에서 관중들은 자신들 속의 슬픔, 아픔, 두려움 등의 감정을 밖으로 내보냄으로써 마음이 깨끗해지는 일종의 정신적 승화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그리스의 비극과 더불어 또 다른 종류의 비극으로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세익스피어가 쓴 많은 작품 중에서도 특히 ‘멕베드’, ‘오셀로’, ‘햄릿’, ‘리어왕’을 일컬어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라고 하며 이 작품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곳에서 연극으로 상연되어 왔고 때로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대중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같은 비극이라도 그리스의 비극과 세익스피어의 비극은 그 성격이 다르다. 그리스의 비극은 주로 운명적인 비극이라고 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이미 정해진 운명의 굴레에서 벌어지는 비극으로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바꿀 수가 없는 비극들인 것이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신이 정해준 운명에 의해, 그 운명을 피하려고 노력해도 피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리스 비극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들 수가 있다.

반면, 세익스피어의 비극은 운명에 의한 불가피한 비극이 아닌 등장인물 자신의 성격적 결함과 행위에 의해 발생하는 비극이다. 욕망에 의해 왕과 동료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패망하는 멕베드나 피부색에 의한 열등감 때문에 정숙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아내를 의심하여 목 졸라 죽이는 오셀로 등은 능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들의 행위와 성격적 결함 등에 의해 파국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그리스의 비극과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운명적인 비극도, 성격의 결함에 의한 비극도 아닌 또 다른 종류의 비극이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졌다. 지난 11일 태안 화력 발전소에서 일하던 24살의 꽃다운 젊은이가 컨베이어에 끼인 채 죽은 지 5시간 만에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아직도 지하철 구의역 참사가 기억에 생생한데 이번에도 비정규직의 젊은이가 아무런 안전 대책도 없이 현장에 내몰려 일하다가 꺾여 버린 것이다. 사고가 나자 관계 장관들이 언론에 나와 책임자 처벌과 함께 부랴부랴 ‘비정규직의 위험의 외주화’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허리를 굽히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2016년 5월 28일에 있었던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때도 지금처럼 호들갑 떨던 정부와 언론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 이후로도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그래서 정부와 언론의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조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비극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비극인지, 그리고 그 저자는 누구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이 참혹한 비극에 관해 말할 수 있는 확실한 것 하나는 이 비극이 그리스의 비극처럼 운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것은 아닐 것이며, 세익스피어의 비극처럼 희생자 개인의 성격적 결함이나 행위에 의한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 비극은 돈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자본과 그에 못지않은 무능한 정부, 그리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심에 찌들어 공동체와 이웃에 대해 눈감는 우리가 공저자로 참여해 쓰고 있는 또 하나의 ‘데쓰노트(death note)'는 아닐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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