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래기 된장국 파티
시래기 된장국 파티
  • 안산뉴스
  • 승인 2018.12.26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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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영 수필가

지난 가을 주말농장에서 수확한 무를 집에 가져오니 아내가 곧바로 동치미를 담근다. 나는 그 때 무 이파리가 달린 줄기를 잘라 가는 끈으로 새끼 꼬듯 묶어 베란다 빨래걸이에 매달아 놓았다. 시간이 지나니 이제는 제법 말라 시래기가 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됐다. 아들네가 아침에 전화를 해서는 오늘 저녁을 같이 하자면서 우리 집으로 온단다.

아내는 전화를 끝내자마자 ‘이번 크리스마스 파티는 전통음식인 시래기된장국과 무침을 만들어 먹자’면서 밖에 있는 시래기 한 다발을 꺼내 물에 얼른 담가 불린다. 저녁밥상의 주 메뉴는 당연히 시래기로 만든 된장국과 시래기무침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좋아할지 몰라 걱정인데 아내는 아랑곳 하지 않고 “요즘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서 끓여봤다. 구수하고 맛있지?” 하면서 연신 솜씨자랑을 한다.

그 말을 끝내자 아내는 냉큼 시래기 된장국을 한 냄비 담고 무침도 한 그릇 담더니 별식이고 건강식이니 앞집에도 가져다주겠다며 나간다. 식사기도가 끝나고 한 숟갈 떠먹어보니 구수한 된장국 맛이 제법 괜찮았다. 시래기 무침도 연한 게 내 입맛으로는 고기반찬보다 더 맛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먼 옛날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시래기 된장국과 나물 무침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울컥해진다.

지금이야 예전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시래기로 만든 음식을 자주 먹어볼 수 없게 됐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시골에선 집집마다 시래기가 흔했다. 대개 김장철이 되면 무를 뽑아 동치미와 깍두기를 담그고 남은 무는 텃밭에 구덩이를 파서 묻어놨다가 꺼내서 무국을 끓여먹거나 무생채를 만들어 먹고는 했다. 그리고 이파리가 달린 줄기는 새끼줄로 엮어서 햇볕이 잘 드는 처마 밑에 매달아 놓는다. 무청은 겨울 찬바람과 때로는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서서히 시래기로 변해 간다.

이렇게 만든 시래기는 겨울 내내 혹은 봄까지도 가정마다 아주 좋은 식재료가 되어 주었다. 어머니는 가끔 그 시래기를 가져다 전날부터 물에 담가 불리고 빨래하듯 치댄 후에 이것저것 다양한 반찬을 해주셨다. 고기나 생선으로 된 반찬거리가 귀했던 그 시절엔 시래기만큼 귀한 식재료도 드물었다. 어머니는 시래기를 된장찌개에도 넣고 고기 국에도 넣기도 했다. 그리고 구수한 들기름을 듬뿍 친 나물로도 해주셨고, 때로는 시래기 전도 부쳐주셨다.

식구들은 한 마디의 군말도 없이 배추김치와 동치미 그리고 시래기 된장국과 시래기무침이면 밥 한 그릇을 맛 바람에 게 눈 감추듯 비울정도로 맛있게 먹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그 때마다 어린 자식들에게 차려준 밥상이 초라하다고 생각하시는지 늘 미안해하셨던 같다. 그러다가도 한 마디의 투정도 없이 밥그릇을 싹 비워내고 더 먹겠다고 말하는 우리들을 보시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곤 하셨다.

나는 요즘도 시내에 나가서 친구와 오찬을 하게 되면 거의 매번 그 옛날 직장 근처 그 자리에 있는 시래기 된장국 집을 찾아 간다. 젊은 날 밤새 술에 취했던 다음 날 해장을 하기 위해 찾았던 서울 무교동의 할머니 시래기 된장국 집이다.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 곳엔 따뜻한 추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때 할머니는 언제나 변함없이 마치 자기 아들처럼 챙겨주시곤 했다. 국이 조금 식었거나 부족하다고 생각되시면 뜨거운 국물을 덤으로 주시고 ‘해장도 좋지만 늙어서 고생하지 않으려면 술은 줄이라’는 충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이제 돌아가시고 그 아드님 내외가 가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곳의 시래기 된장국 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구수하다. 지금은 배가 고파서 라기 보다는 마음이 고픈 때라서 그런지 나는 영혼의 허기를 채우러 그 집을 자주 찾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게 나에게는 아직도 가장 행복한 음식이 되는가 보다. 지금도 이 집을 찾으면 늘 미소로 맞아주시던 할머니를 만나는 것 같다, 할머니를 만나면 고향을 만나고, 그리운 어머니도 만난다.

요즘처럼 날씨가 추워지면 나는 어김없이 뜨거운 시래기 된장국이 생각난다. 감기가 들어오거나 연말이어서 괜히 마음이 허전해지면 시래기 된장국물 생각은 더 절실해진다, 그런 날 집에 시래기가 없으면 혼자서라도 그 집을 찾아간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뜨끈함을 느끼면서 고향과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래서 시래기 된장국은 내게 바로 영혼의 음식인 셈이다.

엊그제는 재경 초등학교 동창부부 모임이 있었다. 연말인데 그냥 보낼 수는 없다면서 살아있는 친구끼리라도 만나자는 것이다. 즉석에서 찬성했다. 기형이, 명식이, 남구, 천우, 홍식이 나 그렇게 해서 6명의 부부란다. 메뉴는 내가 선택하란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고향 냄새가 물씬 나는 시래기 된장국을 추천했다. 모두가 좋다고 했다. 그날 송년 모임은 어머니 품속 같이 무척 포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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