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원으로 치환될 수 없는 것들
500원으로 치환될 수 없는 것들
  • 안산뉴스
  • 승인 2019.01.09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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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하 안산대 교수

500원 순례여행을 떠나는 노인들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 있습니다. 몇몇 종교단체에서 노인들에게 500원짜리 동전 세 개를 일주일에 한 번 선착순으로 나눠줍니다. 노인들은 동전을 받기 위해 먼 길을 찾아가 긴 줄을 섭니다.

동전을 나누어 주는 이가 종이컵에서 500원 동전을 꺼내면 줄을 선 노인들은 두 손을 포개 동전을 받고 깊게 허리 숙여 인사합니다. 한파의 긴 기다림 속에서 그들은 먼저 받으려 새치기하거나 다투어 싸움이 나기도 합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고작 500원짜리 동전 몇 개 때문에 왜 이렇게 수고를 하시죠? 할머니가 답했습니다.

“그걸 모으면 천원도 되고 1천500원도 되잖아. 다급한데 그거라도 받아야지. 배고픈데 그렇게 모으면 밥은 못 먹어도 두부 한 모는 사서 먹을 수 있잖아.”

강남한복판에 사는 오랜 친구는 강북 산꼭대기 초등학교의 교사입니다. 어느 날 친구는 말했습니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무료로 개설되는 다양한 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해. 그러나 이 프로그램을 소개하면서 아이들에게 공짜 좋아하지 말라고 가르쳐. 세상에 공짜는 없고, 너희가 한 만큼만 받는 거란 걸 알려주는 거지.”

지난 1년 반 동안 근무했던 전주는 상대적으로 느린 도시입니다. 노인들이 많은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도시의 태생은 그 자체가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정류장은 다음 버스가 언제 오는지, 어디 즈음 왔는지 기계화되어 알려주지만 노인들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지팡이 진 굽은 몸이 전광판과 버스에 적힌 노선을 열심히 읽지만 탈 것인가 말 것인가를 판단하기도 전에 버스는 오고 갑니다.

노부부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타박하지만 그는 돋보기를 썼다 벗었다 전광판의 작은 글씨만 유심히 들여다 볼 뿐입니다. 어떤 노인은 검고 곱은 터진 손으로 택시를 잡아 느릿하게 올라타기도 했고, 어떤 노인은 하염없이 앉았다 일어섰다 노선표를 바라보다 버스를 놓치며 여전히 떠나지 못하기도 했고, 어떤 노인은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 한참을 기다리다 발길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눈이 쌓여 얼고 울퉁불퉁하고 미끄러운 도시는 지팡이가 느리게 걷기에는 지나치게 빨랐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근원적 독점이라고 말합니다. 공간과 문화는 부를 지향하도록, 그러한 능력을 가진 것에 가치를 부여하도록 독점되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빈곤하고 비참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한 공간과 문화를 원하느냐 원치 않느냐, 동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고려되지 않습니다.

돈을 버는 것, 부를 축적하는 것, 그럴 수 있는 신체를 지니는 것, 끊임없이 노동하는 것을 지향하도록 도시가, 문화가, 정책이 독점적으로 구성되어져 있을 뿐입니다. 근원적 독점의 구조 속에선 선의에서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모욕과 모멸과 비참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합니다.

한파에 길게 줄을 늘어서도록 하고 500원 동전을 받아내도록 하는 모욕, 복지를 공짜라는 자본주의적 언어로 치환해 빈곤에게 부여하는 모멸. 존재를 존중하거나 배려하지 못하는 도시의 구조적 공간과 관계들. 부와 부를 가능하도록 하는 신체로부터 멸시당하고, 멸시당하면서도 저항할 수 없도록 하는 무력이 이 세계의 비참이 되는 것입니다.

오전, 존경하는 한 원로 교수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명하야~” 늘 첫 마디는 이렇습니다. “요즘 날이 너무 찬데 어떻게 지내니?” 여전히 막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며 이리저리 분투한다는 핑계로 전화 한통 안하는 제자에게 주름진 목소리로 말을 건넵니다.

그러면 그만 뾰족뾰족하던 수많은 신경들은 사라지고 각박해진 차가운 마음에 졸졸졸 물이 흐르게 됩니다. 전제가 잘못된 연민이나 숫자로 치환될 수 없는 것들이 주름 속에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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