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부끄러운.
자화상, 부끄러운.
  • 안산뉴스
  • 승인 2019.03.06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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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하 안산대 교수

‘너는 우울한 이야기들에 매료되나봐...’라는 질문, 혹은 판단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우울’이라는 1인칭 감정으로 치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울’보다는 ‘비애로움과 슬픔’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감정에 내가, 나의 감정에 당신이 서로 흘러들어 섞였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2인칭, 혹은 3인칭의 감정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렇게 내가 당신의 슬픔과 비애를 연민할 수 있는 사람이라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 그 순간의 침묵과 어색함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강사법이 새로 개정되며 자칫 당신의 자리가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고 변명하겠습니다. 주변의 여러 강사들이, 후배들이, 선배들이 개정되는 강사법에 대비하여,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개정되는 강사법에 대비한 대학의 대처에 대비하여, 어떻게 그렇지 않지만 그런 척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던 것들을 그대로 당신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개인사업자 등록을 해야 한다는 것, 혼자 하는 것보다는 여러 강사 동기 선후배들과 함께 하는 것이 비용 절감이 될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 말입니다. 마치 대단한 정보를 주는 양, 마치 대단한 걱정을 하는 양 행세하며 말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신의 반응은 내 ‘연민인 척’에 대해 당연히 기대되는 역할이었습니다. 당신 내게 알려줘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옆에 있던 선배가 말했습니다. “너네 그거 꼼수잖아.” 바로 그 순간의 침묵과 어색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의례 같은 겁니다. 이를테면 죽어가는 이 앞에서 “건강해 보이시네요, 이제 곧 나아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실 것 같아요”라는 의례에 “그렇지, 이제 많이 나았어. 곧 일어나게 될 거야”라고 말하며 시작되는 이야기. 그때 갑자기 등장한 또 다른 친구가 “이렇게 젊은데 그런 병이라니, 이건 꿈일거야” 라는 말. 당신도 알고 나도 알지만 안다는 걸 숨기고 주고받는 이야기에 모든 걸 드러내는 말이 끼얹는 침묵과 어색함의 순간들 말입니다.

나는 “꼼수”라는 단어보다 “너네”라는 단어에 베었던 것 같습니다. “너네”라는 그어진 금 앞에서 나와 당신은 달랐습니다. 내가 주장한 강사법이 아니었고 내가 생각해 낸 꼼수가 아니었지만, 꼼수라 불린 대처는 내가 속한 금 이쪽 편의 것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슬픔에 공감하고 연민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권력에 개인으로 맞서야 하는 당신의 편이어야 했습니다. 부당하다고 이야기 했고, 부당하다고 이야기하는 의견에 동의했고,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글들을 열심히 내 공간에 옮겨다 놓았습니다. ‘내가 속한 금 이쪽 편은 부당하지만 난 그들과 달라’ 라고 끊임없이 자위한 셈입니다. 그리곤 부당함 한복판에 있는 당신에게 그 부당함의 가랑이 사이로 어찌 지나야 하는지를 부당함의 얼굴로, 부당함의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런 내 허위와 기만을 선배는 “너네”란 표현으로 간단히 무너뜨렸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돌아온 뒤, 한참동안이나 그 날의 침묵과 어색함이 생각났습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쓴 신형철 교수의 글을 읽다보니 그 침묵과 어색함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얼핏 알 것도 같았습니다. 그는 “폭력이란 어떤 사람, 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라고 말합니다. “타인에 대한 잠재적, 현실적 폭력은 더 섬세해질 수도 있으나 그러지 않기를 택하는 순간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더 비수 같았던 그의 통찰은 “단편적인 정보로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즐거워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말하던 장면입니다. 그 날의 침묵과 어색함은 연민으로 가장한 폭력, 폭력을 숨긴 연민에 자기만족 하고 있던 “나”가 실은 천박한 연민, 잔인한 폭력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 부당함에 함께 부딪히자고 말해야 했던 것일까요. 아직도 금 이쪽 편에 있는 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슬픔은 기껏 연민이어서 당신의 슬픔에 직접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형철 교수의 말대로 그래서 당신의 슬픔에 더 무참해지지 않기 위해선 공부해야 하는 것이고, 그럼에도 온전히 닿을 수는 없어 슬픔을 공부하는 것은 슬픔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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