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그림자가 앞설 때

최라영 안산대학교 교수

2025-12-10     안산뉴스

사회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이고, 사람이 아니라 말이다. 말은 관계의 실타래를 엮어내지만, 때로는 그 관계보다 앞서 나아가 그림자를 드리운다. 최근 나는 말의 그림자가 진실을 앞서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이 경험을 통해 ‘뒷담화’라는 인간의 해묵은 습관이 한 개인의 명예와 관계의 근간을 얼마나 쉽게 흔들 수 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됐다.

초년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는 그저 현명한 사회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말을 아끼는 3년, 들어도 못들은 척 3년, 보고도 못 본 척 3년’을 주문처럼 새기며 지냈다. 말보다 경청을, 섣부른 판단보다 관찰을 우선하는 것이 지혜라고 믿었다. 그 시절에는 타인의 말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일도 드물었다. 조직에서 말 한마디가 가지는 무게를 실감하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고, 내 말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만큼의 위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침묵은 안전했고, 듣는 것은 지혜로웠다. 그때는 그랬다.

그러나 중년이 되고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자 상황은 달라졌다. 말은 이제 단순한 소통의 도구를 넘어, 사람을 규정하고 관계의 방향을 결정하는 요소가 됐다. 어느 날, 내가 하지 않은 말이 마치 내가 한 것처럼 조직 전체를 돌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는 누군가의 해석을 거치며 무섭게 부풀고, 누군가의 감정을 만나며 사실로 굳어진다. 결국 그것은 ‘그럴 법한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어느 순간 내 이름표를 달고 내 앞에 도착했다.

나는 그날 말이 얼마나 빠르게 본래의 옷을 갈아입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도는지를 목격했다. 또한 진실이 아닌 오해가 한 사람의 이미지를 얼마나 순식간에 바꾸어 놓는지 절감했다. 누군가의 시선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던 이유도 그제야 이해되었다. 말의 그림자가 진실보다 먼저,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뒷담화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사회적 습관 중 하나이며, 심리학에서는 이를 일종의 사회적 통화(Social currency)로 설명한다. 타인의 경험을 공유하는 이 과정은 공동체의 규범을 확인하고, 불안과 분노를 언어로 배출하여 정서적 균형을 찾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통화의 가치는 언제든 변질될 수 있다. 사실보다 감정이 앞서고, 신중한 성찰보다 성급한 해석이 우선되는 순간, 뒷담화는 누군가의 명예와 관계를 훼손하는 파괴적인 도구로 변모한다.

더욱 어려운 지점은 뒷담화를 나누는 마음이 반드시 악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고, 당사자가 없는 자리라는 환경적 이유만으로 말의 색채가 미묘하게 변질된다. 결국, 말의 주인이 아닌 해석의 주인이 생겨나는 순간, 그 말은 이미 본래의 사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런 뒷담화를 완전히 없앨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人間)은 본질적으로 관계 속에서 감정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뒷담화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대하는 태도를 깊이 성찰하는 데 있다.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과연 그 사람이 이 자리에 있어도 나는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억울함을 토로하는 순간에도, 나의 이야기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는가? 아니면 격앙된 감정이 본질을 덮어버리고 있는가?

누군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사실처럼 비치는 ‘그림자’인지 분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뒷담화를 마주할 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말을 멈추는 침묵의 기술이 아니다. 말은 언제든 사람보다 앞서 큰 파급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의 방향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은 오직 우리, 사람뿐이다.

요즘 나는 이런 다짐을 자주 한다. 내가 내보내는 말이 누군가를 흔드는 소문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켜주는 온기(溫氣)가 되기를. 그리고 내가 없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나를 이야기할 때에도, 내가 살아온 진실한 태도가 나를 대신 변호해 주기를.

말의 그림자는 언제든 우리의 실체를 앞질러 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 그림자가 결코 우리의 실체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진실이 비록 늦게 도착하더라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말과 관계를 지키며 살아가는 가장 단단하고 굳건한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