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청지사

하태호 단원청소년수련관 활동문화팀장

2026-01-21     안산뉴스

‘오직 맛으로 압도한다’는 선언과 함께 시작된 ‘흑백요리사’ 시즌2가 막을 내렸다. 이 프로그램은 요리의 세계를 계급으로 나누되, 그 경계를 오직 결과물로 허물겠다는 실험에서 출발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타 셰프와 현장에서 실력으로 인정받아온 요리사들이 한 주방에 모여 이름과 이력, 배경을 잠시 내려놓는다. 접시 위에 오른 결과로만 서로를 마주하는 이 서바이벌 요리쇼의 긴장감은 단순한 승패를 넘어선다. 베테랑의 축적된 내공 앞에서 숨은 고수의 도전이 과연 이변이 될 수 있을지, 매회 차마다 같은 질문이 따라붙는다.

100인의 요리사가 펼치는 이른바 ‘요리 계급 전쟁’은 요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가 더 유명한가, 누가 더 오래 버텨왔는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한정된 재료와 시간 앞에서 무엇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만들어내는가를 묻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불 앞에서는 흑과 백, 위와 아래로 나뉘던 경계가 흔들린다. 그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공정함과 가능성, 그리고 도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이 남긴 여운은 주방 밖으로 이어진다. 이름표가 아닌 실력으로, 배경이 아닌 태도로 평가받는 세계는 과연 가능한가.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장면을 얼마나 진지하게 상상해왔는가. ‘흑백요리사’는 요리쇼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안에는 지금 우리 사회가 외면해 온 질문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쇼를 보며 자연스레 하나의 상상이 떠올랐다. 이름하여 ‘흑백청지사’다. 전국의 청소년활동 현장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온 청소년지도사 100명이 한자리에 모여 활동을 펼치는 무대다. ‘백수저’에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선배 지도사들이, ‘흑수저’에는 활동 경력은 짧지만 자신만의 철학과 실천으로 현장을 만들어가고 있는 지도사들이 선다. 특히 ‘거리의 지도자’, ‘참여 설계자’, ‘마이크 괴물’, ‘판을 만드는 사람’ 같은 이름의 흑 청지사들은 경력과 명성 대신 지금 여기에서의 기획과 실행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요리 대신 무대에 오르는 것은 참여, 교류, 체육, 문화, 동아리, 진로 등 청소년활동의 핵심 주제들이다. 제한된 조건 속에서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실제 청소년과 함께 과정을 만들어가며 결과를 완성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화려했는가가 아니다. 그 활동이 청소년의 삶과 얼마나 맞닿아 있었는지, 그리고 변화의 문을 얼마나 넓게 열어두었는지가 기준이 된다.

심사 방식 역시 다르다. 한 축에는 현장을 오래 경험해온 베테랑 활동가가, 다른 한 축에는 그 활동을 직접 경험한 청소년이 선다. 지도사의 언어만이 아니라 청소년의 감각과 판단이 평가의 기준이 될 때, 이 무대는 비로소 살아 있는 장면이 된다.

이 상상은 다시 현실의 청소년활동 현장으로 이어진다. 요리의 본질이 화려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결국 ‘맛’인 것처럼, 청소년활동의 본질 역시 프로그램의 규모나 기획의 세련됨이 아니라 청소년의 변화일 것이다. ‘흑백요리사’에서 시청자는 그 맛을 직접 경험할 수 없기에 심사위원의 언어를 통해 결과를 가늠한다. 그러나 청소년활동은 다르다. 우리는 청소년이 변화해가는 과정을 현장에서, 때로는 매우 직관적으로 마주한다. 그 변화는 숫자보다 태도에서, 성과보다 관계에서, 결과보다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어쩌면 내가 상상하는 ‘흑백청지사’는 승자를 가리기 위한 프로그램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가 더 옳은지를 가리는 대신, 서로 다른 길이 어떻게 청소년을 향해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자리일 것이다. 주방에서 불이 모든 경계를 녹였듯, 청소년의 삶 앞에서도 경력과 직함의 벽은 허물어질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의 청소년활동은 청소년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