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으로 읽고 마음으로 보는 세상
이혜란 시인
우리는 눈으로 세상을 읽지만, 세상의 모든 진실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우리가 외면해 온 진실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고 있는가. 수많은 장면을 눈에 담으면서도 정작 보아야 할 사람의 마음은 놓치고 있지 않은가. 글자는 눈으로 읽지만, 그 문을 여는 여섯 개의 작은 점은 누군가에게는 어둠 속에서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11월 4일은 송암 박두성 선생이 한글 점자 ‘훈맹정음’을 만들어 반포한 것을 기념하는 ‘한글 점자의 날’이다.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깊은 어둠은 눈앞의 세상을 보면서도 타인의 삶을 외면하는 데 있다. 점자의 날은 손끝으로 세상을 읽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날이다. 그러나 이날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은 시각의 한계만이 아닐 것이다. 서로 다른 감각과 조건을 지닌 사람들이 같은 세상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보이지 않는 글자가 누군가에게는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가 되듯, 우리의 작은 배려 하나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필자는 장애인 터링대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지체 장애, 지적장애, 청각장애, 시각장애가 있는 선수들이 경기에 참석했다. 그중 시각장애가 있는 선수들을 위한 도움 도구가 준비되어 있었다. 주최 측의 세심한 배려가 경기를 진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자신감을 주었다.
유심작불(唯心作佛)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에 따라 깨달음의 세계를 이룬다는 뜻으로 세상을 대하는 마음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이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아도 마음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장애를 먼저 보는 사람도 있지만 가능성을 먼저 보는 사람도 있다. 또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스스로 선택하고 살아갈 권리를 가진 인격체로 바라보기도 한다. 결국 시력의 차이가 아닌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의 깊이로 결정되는 것이다.
헬렌 켈러의 삶은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한계를 넘어 언어를 배우고 세상과 소통하는 삶은 인간의 가능성이 신체적 조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녀에게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었다. 세상과 연결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며, 삶의 주체로 서게 하는 통로였다. 손끝으로 익힌 언어가 세계를 향한 문을 열었듯, 점자는 독립적 삶과 배움 그리고 존엄을 유지하는 중요한 글자다.
우리의 인식도 사회가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장애를 개인이 감당해야 할 불편으로만 여기는 것은 아닐까. 점자 안내가 부족한 건물, 음성 안내가 없는 시설, 접근하기 어려운 정보 앞에서 일상을 포기하기도 한다. 선의에 기대 베푸는 친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권리의 보장이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제도와 환경이다.
유심작불(唯心作佛)의 뜻을 오늘의 사회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느냐에 따라 세상의 모습도 달라진다. 장애인을 동등한 시민으로 바라보면 장벽을 없앨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시선이 달라지고, 제도와 일상의 풍경도 같이 변한다.
점자는 손끝으로 읽는 문자다. 그러나 그 문자는 손끝의 감각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와 다른 삶을 존중하는 능력이다. 헬렌 켈러가 언어를 통해 세상과 만났듯, 어둠은 빛을 향한 의지까지 가두지는 못한다. 정작 두려운 것은 눈앞의 어둠이 아니라 타인의 어둠을 외면하는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깊은 어둠은 타인을 보지 못하는 마음이다. 점자의 날이 필요한 이유는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보면서도 외면하는 사람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어둠은 타인을 향해 닫힌 마음과 보지 않으려는 마음에 있다.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둘째 날은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고, 셋째 날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거리를 보고 싶다던 헬렌 켈러가 어둠 속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길을 열었다면, 이제 우리가 열어야 할 것은 차별과 편견으로 닫힌 사회의 문이다. 점자는 손끝으로 읽지만, 배려는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