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어디로 갔을까

최라영 안산시평생학습관장/안산대 교수

2026-11-04     안산뉴스

가을은 내가 유난히 좋아했던 계절이다. 특히 학창 시절의 가을은 기다림만으로도 설레는 계절이었다. 친구들과 떠나는 소풍이 있었고, 교정에는 국화꽃이 피었으며, 여고 시절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축제는 가을을 기다리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축제를 앞두고 친구들과 들떠 있던 시간, 별것 아닌 일에도 까르르 웃던 그 시절에는 가을이라는 계절 자체가 낭만이었다.

가을이면 갈색 계열의 옷이 유난히 멋스럽게 느껴졌다. 프렌치코트 하나만 걸쳐도 제법 분위기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고,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보며 괜스레 감상에 젖기도 했다. 오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를 읽으며 마지막 남은 잎 하나에 마음을 졸이던 기억도 있다. 그때는 떨어지는 낙엽조차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가을은 그렇게 나를 조금 더 감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계절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그토록 기다리던 가을이 어느새 스쳐 지나가는 계절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 짧은 소매 옷을 입고 다녔는데, 어느 날 갑자기 패딩을 꺼내야 하나 싶다. 선선한 바람을 즐길 새도 없이 찬바람이 불고, 단풍이 물들었다 싶으면 어느새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 봄과 가을이 짧아졌다는 이야기가 새삼스럽지 않다.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말도 이제는 옛말처럼 느껴진다.

계절만 달라진 것은 아닌 듯하다. 가을을 맞이하는 내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가을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요즘은 가을이 왔다는 사실조차 뒤늦게 알아차린다. 하늘이 높아졌는지, 나뭇잎이 얼마나 물들었는지 살필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는데, 정작 나는 그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올해 시월은 유난히 분주했다. 안산시 평생학습도시 20주년을 맞아 안산시평생학습관에서는 닷새 동안 성과공유회를 진행했고, 곧이어 안산시 주최의 평생학습축제도 있었다. 오랜 시간 준비한 일들이 하나둘 결실을 맺었고, 많은 사람이 함께 웃고 즐기는 풍성한 시간이었다. 가을이 수확의 계절이라면 그야말로 수확의 기쁨을 누릴 만한 시월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행사가 끝나고 나니 성취감보다 허전함이 먼저 찾아왔다. 그렇게 바쁘게 달려왔는데, 막상 끝나고 나니 무엇인가 빠져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분명 많은 것을 이루었고 감사한 일도 많았는데, 마음 한편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남았다.

풍요로운데 공허하다. 참 모순된 감정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무언가를 향해 달려간다. 하나의 일을 마치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성과를 이루면 다음 목표를 준비한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동안 정작 그 시간을 누리는 일에는 서툴러진다. 결실을 맺기 위해 애쓰면서도 막상 열매가 익어가는 모습을 바라볼 여유는 갖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느낀 허전함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열심히 살아온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시간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가을의 풍요로움은 수확한 열매의 크기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닐 텐데, 언제부터인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는지가 하루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문득 여고 시절의 가을이 그리워진다. 그때라고 특별히 가진 것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부족한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을은 풍요로웠다. 무엇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길 줄 알았기에 행복했던 것 같다. 물론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때와 다른 역할과 책임이 있고, 해야 할 일도 많다. 그렇다고 계절을 느끼는 마음까지 잃어버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잠시 걸음을 늦추고 물든 나뭇잎을 바라보는 일, 차가워진 바람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일, 수고한 하루를 스스로 다독이는 일. 어쩌면 그런 소소한 순간들이 바쁜 일상을 견디게 하는 힘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계절은 언제나 제 몫의 아름다움을 품고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바쁘다는 이유로 내가 그 아름다움을 미처 바라보지 못했을 뿐이다.

올가을이 다 가기 전에, 잠시 멈추어 가을을 바라보려 한다. 계절을 붙잡을 수는 없어도, 그 계절을 느끼는 마음만큼은 잃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