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신문에서 듣는 신문으로
말하는 신문에서 듣는 신문으로
  • 안산뉴스
  • 승인 2018.10.24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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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석 안산시독서동아리네트웍 회장

성경에는 지혜로운 사람의 대명사격인 솔로몬 왕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등장한다. 두 창녀가 살아있는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우기자 솔로몬 왕이 누가 아이의 어미인줄 알 수가 없으니 칼로 아이를 갈라 공평하게 나누어 주라고 한다.

그러자 가짜 엄마는 왕의 판결대로 나누어 달라고 한 반면 진짜 엄마는 자기가 가짜이니 아이를 살려 상대 여자에게 주라고 말한다. 이에 솔로몬 왕은 아이를 살리라고 한 여자가 진짜 아이의 엄마라며 그 여인에게 아이를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일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어쩌면 솔로몬의 판결 내용보다는 솔로몬의 자세일 것이다. 솔로몬이 판결해준 피고는 유명 인사도 아니었으며 권력이나 재물이 많은 유력 인사들도 아니었다. 성경에는 그녀들의 신분이 당시에 개와 동등하게 취급당했던 비루한 창녀들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고대 중동 지역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패권 국가이었기에 왕이 처리하고 신경 써야 할 국내외 적인 업무가 한 둘이 아니었을 터인데도 그런 왕이 일개 하찮은 창녀의 호소를 무시하지 않고 들어주었다는 점이 어쩌면 이 일화의 초점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솔로몬이 왕위에 즉위하자 꿈에 야훼 하나님이 나타나 소원을 물었다. 이에 솔로몬은 “이제 저에게 ‘지혜와 지식’을 주셔서 백성들을 재판하게 하옵소서”(역대하1장10절)라고 답을 하게 되는데 이것과 똑같은 장면이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열왕기상3장9절)라고 표현되어 있다. 즉, 솔로몬이 구한 지혜란 바로 ‘듣는 것’이었다. 이렇게 솔로몬은 창녀의 이야기마저도 주의 깊게 들어주었고 이로 말미암아 현대까지도 지혜로운 사람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예전 우리의 마을에는 무당들이 거주하던 당골이라고 불리는 집들이 있었다. 이 당골은 마을 아낙들의 해방구 같은 역할을 담당했는데 아낙들이 집안 일로 당골을 찾아가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자연스레 시어머니의 구박과 남편의 무관심과 폭력, 게다가 끝없이 쏟아지는 집안일과 농사일 속에서 그 어디에도 풀지 못하고 가슴에 켜켜이 쌓아놓았던 무거운 짐들을 함께 비워내곤 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힘과 위로와 비워낸 가슴으로 다시 이어지는 그 모진 세월을 또 담아가며 견디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당골이 지금의 단골이 된 것이다.

한자로 듣는다는 글자가 청(聽)이다. 이 글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귀(耳) 밑에 왕(王)이, 열 개(十)의 눈(目)이, 그리고 하나(一)의 마음(心)이 있다. 즉 듣는다는 것은 왕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말하는 이의 상황과 태도, 처지 등을 면밀하게 보아가며 더불어 온 마음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제대로 듣는다는 것은 온 몸과 마음을 다 써야만 하는 고난도의 행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글자가 아닐 수 없다.

‘안산뉴스’가 새로이 출발한다. 안산에는 이미 안산을 지역으로 하는 신문이 여러 개가 있다. 안산뉴스가 수많은 주장이 판치는 세상에 또 하나의 소음을 더하는 그렇고 그런 신문들 중의 하나가 아닌 이청득심(以聽得心),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고 위로하고 격려해 줌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말하기 전에 먼저 잘 들어주는 그런 신문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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