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볼일 없는 집(2)
별 볼일 없는 집(2)
  • 안산뉴스
  • 승인 2019.12.1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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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삼 안산시청소년재단 대표이사

‘잇날 왕년에 느그 조상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렇게 시작하는 조부님의 일장 훈시는 사방이 터진 시원한 사랑방 마루에 무릎 꿇고 앉아서 들어야 했다. 단원의 그림 ‘서당’을 연상하면 된다. 한양에 살던 선비 한 분이 풍선(風船) 배를 타고 제물포를 거쳐 서해바다로 내려와 전라도 영광에다 터를 잡았더란다.

거기서 수년을 살다가 식솔을 이끌고 다시 임자도라는 섬에 들아왔는디 그분이 바로 느그덜 8대조 되시는 어른이시다. 그리고는 들릴 듯 말 듯 하는 소리를 한숨에 섞어 법성포에서 사시지 멋 하실라고 이 좁은 섬 꾸석으로 들어오셨을거나 하는 살짝 ‘불손’한 말로 엔딩하는 것이 조부님이 우리에게 들려주던 ‘김씨 가문 남하 경로기’다.

조부님의 이런 ‘썰’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고 들을 때마다 각색되고 부풀려지는 경향도 있었다.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준 속셈은 ‘한양에서 내려온 뼈대 있는 집안’임을 세뇌시키기 위함이었겠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전략 실패다.

내가 어른이 된 이후 관찰한 바 조부님 이래로 백숙부님들을 보거나 집안을 봐도 ‘뼈대는커녕 뼛조각’도 찾아볼 수 없이 별 볼일 없음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후손들이 자부심 갖고 살도록 안간 힘을 쓰시고 거기에 힘을 보태던 할머니의 노력이 간절했을 뿐이다.

조부님의 노력에 상응하는 삶을 살지 못하지만, 후손을 위한 ‘반복된 일장 훈시’와 ‘극한 애정’이 조부 가신지 기십 년이 되는 2019년 겨울 작금의 나에게 유효한 사적 가치로 남아있음은 그나마 다행이다.

아무튼 ‘한양에서 왔다는 도래설’도 조작된 것으로 의심되지만 그래도 조부님 말씀이니 7할 정도 신뢰한다면 남루한 의상을 걸친 김씨 조상 한 분이 영광법성포 나루에 정착한 시기는 지금부터 대략 250년 전쯤으로 짐작된다.

역사는 그때를 18세기 중반이라고 했으며 조선 조정은 사도세자가 갇혀 죽어 어수선했지만 대체로 태평성대를 누리던 시기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평화로운 시절에 8대 선대는 먼 연고로 한양에서 천리 떨어진 서남해 낙도까지 내려왔을까.

혹시 유배나 피신을 오지 않았을까 하여 ‘기대’를 하고 족보를 뒤졌지만 그런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먹고 살 것 찾으러 동가식서가숙으로 주유조선 끝에 포도시 찾은 곳이 고려 중기 이후 최적의 귀양지로 각광 받던 신안땅 아니었을까. 나는 그리 편리하게 추정하고 산다.

퇴락한 김해김씨 후손인 것에 무한 자부심을 가진 채 집안 중시조(中始祖)임을 자처하며 면 출입깨나 하던 조부님은 약주를 자신 후 ‘태산이 높다하되∼’로 시작하는 시조를 자주 읊으셨고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당신께서 거천하시는 모방이나 사랑으로는 늘 외지 손님을 위한 술상이 걸게 차려져 들어갔고 그럴 때면 옥양목 한복을 곱게 입은 할머니가 도구통에 양념을 갈아 김치 담그고 석쇠에 굵은 소금 뿌려가며 조기생선을 굽곤 했다.

까만 가마솥에 장작불 피우며 손님 저녁상을 정성껏 준비하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분주한 모습이 눈에 선하고 무쇠솥 소두랑 틈새에서 바깥구경 하려고 픽픽 새어나오던 밥 눈물도 눈에 어른거린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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