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안산시문화유산이야기(14)
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안산시문화유산이야기(14)
  • 안산뉴스
  • 승인 2020.02.04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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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처윤(洪處尹) 선생 묘와 묘갈(墓碣)

홍처윤(1607년(선조40)~1663년(현종3)) 선생의 묘역은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112-2에 위치하고 있다. 선부동의 석수초등학교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첫 번째 도로(선여불로)로 300m쯤 들어가 삼익아트빌2차 옆의 나지막한 산에 위치하고 있고 도로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

묘역의 관리를 위해 종중에서 울타리를 치고 문을 잠가 놓아 아무 때나 들어갈 수는 없다. 종중의 관리자와 사전 예약이 돼야 들어가 볼 수 있다.

홍처윤의 자는 지임(之任), 호는 안분재(安分齋),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경기관찰사 명원(命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부호군 윤민준(尹民俊)의 딸이다.

1639년(인조 17)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40년 예문관검열, 1641년 감찰, 1643년 홍산현감(鴻山縣監)을 거쳐, 1648년 복직되어 정언·수찬을 역임하고, 1650년(효종 1) 응교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이해 지평이 되어 영의정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했다. 교리가 되어서는 당쟁(黨爭)의 무해(無害)함을 진술하다가 삭직되었으나, 곧 배천군수(白川郡守)로 기용되어 선정을 베풀어 군민이 합심해 송덕비를 세웠다.

1652년 보덕으로 승진되었고, 사인을 거쳐 이듬해 교리가 되어 사노(私奴)로서 충군(充軍)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내용의 소를 올렸으나 그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효종이 옛 성인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뜻을 알고자 ‘서전(書傳)’에 쓰여 있는 기형(璣衡):천문을 관측하는 기계)을 만들어 바칠 것을 명하자 이것을 만들어 올려 많은 찬사를 받은 바 있고 이로 인하여 직강·수찬이 되었으나 곧 삭직됐다.

1654년 다시 보덕에 임명되어 직강·교리가 되고, 1656년 금성군수(錦城郡守), 1658년 응교·사간·사인, 이듬해 수찬·사간·사예·종부시정을 지냈다.

효종이 죽자 사인 겸 빈전도감도청이 되고, 이어 교리 겸 한학교수를 거쳐 통정대부로 승진, 동부승지가 됐다. 이듬해 형조참의·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663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예조참의에 이르렀고 이조참판에 추증됐다.

묘역에는 홍처윤과 아들 홍수기(洪受箕)·홍수서(洪受敍) 등의 무덤이 있는데 홍처윤의 무덤은 그 중 가장 위쪽에 있으며 방향은 곤좌(坤坐, 서남향)이다. 무덤의 석물로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상석의 좌우에 망주석이 하나씩 있다.

묘역의 우측에는 행적비가 있고 좌측에는 묘갈이 있다. 1697년(숙종 23) 건립된 묘갈은 귀부(龜趺, 비석을 등에 지고 있는 거북 모양의 돌 조각 장식품)와 이수(螭首, 비석의 윗부분에 뿔 없는 용을 아로 새긴 형상 )가 잘 남아 있는데 귀부는 규모가 180×110×60cm이며 거북은 균형 잡힌 몸매에 섬세하고 세련된 모양을 하고 있다.

이수는 옥개석의 형태로 하단부에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으며 윗부분은 보주형 꼭지에 팔작지붕 형태로 규모는 110×90×50cm이다. 비신은 140×56×33cm이다. 비문은 민진장이 짓고, 홍우정이 글씨를 썼으며, 홍수주가 전액(篆額 전자로 쓴 비석의 머리)했다. 홍처윤 선생 묘와 묘갈은 1991년 11월 2일 안산시 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됐다.

(참고문헌)

‘내고장 안산’(내고장안산편찬위원회, 1990)

‘안산시사’(안산시사편찬위원회 2011)

‘안산 아름다운 향토문화’(안산시 2019)

안산뉴스에 연재되었던 ‘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안산시문화유산이야기’가 필자의 사정으로 잠시 중단됐다가 다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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