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와 차 한 잔의 사색
만추와 차 한 잔의 사색
  • 안산뉴스
  • 승인 2018.12.0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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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영

아파트 담장의 담쟁이 잎이 갈색으로 물들어 떨어지고, 아침저녁으로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만추의 계절이다.

지난여름 유난히도 더워서 때마다 아이스크림 타령을 하던 아이들도 늦가을 바람 앞에서는 어느새 가을이 끝나갔느냐는 듯 어리둥절 한다.

뿐만 아니라 무덥기만 하던 지난여름이 벌써 추억이 되어 여름 휴가지의 해수욕장 이야기를 아름답게 미화시키곤 한다. 아무리 고달프고 괴로웠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가 보다.

가을도 해마다 똑 같은 가을이지만 또 다시 돌아오면 매번 새로운 이미지를 남기곤 한다. 맑은 가을 하늘,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소슬한 바람, 울긋불긋한 단풍잎, 모두가 마치 세잔느의 그림처럼 운치 있는 풍경이다.

나는 은퇴하면서 가을을 더 많이 사랑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낙엽 지는 공원 벤치에서 시를 구상한다든가 코스모스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걸으면서 사색에 잠기는 일이 가장 즐거운 일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조용히 앉아 사색을 즐길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바쁘고 시간에 쫒기는 삶 때문이었다. 그래서 휴식시간이 바로 사색하는 시간이고 이 시간마저도 내가 애써 만들어야 얻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시인이 시만 써도 생활이 되는 시대가 온다면 세상은 얼마나 밝고 낭만적일까 하고 생각한 일이 있다. 참으로 한가한 생각이었다. 그 해 어느 날이었다. 광화문 직장 부근의 한 2층 찻집에서 홍차 한 잔을 시켜놓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열린 창문으로 가로수 잎 하나가 뚝 떨어져 날아 들어왔다. 그 잎이 하도 반갑고 아름다워서 그 곳에 자작시 한 구절을 적어 창밖으로 날려 보냈다.

그 때 마침 그 앞을 지나던 아리따운 여인이 그 낙엽을 주워 시를 읽으며 위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이 코스모스만큼이나 청초하여 괜히 부끄럽고 멋쩍어서 얼굴을 숨겼다. 하지만 그 여인이 나를 생각할 것을 생각하면서 해마다 가을이 되면 자주 그 찻집 창가에 앉아 그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행복해했던 기억이 난다.

가을은 흔히 남자의 계절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남녀 누구의 계절이든 상관이 없다. 누구든 지난날을 회상케 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리라. 자기의 옛일을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여름에 무성했던 나무도 가을엔 열매를 맺는다. 하물며 사람이 열매를 보고도 무성했던 시절을 뒤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가을은 우리에게 생각의 깊이를 더 하게 하는지 모른다. 바쁜 일상에 쫒기는 발 앞에 떨어지는 낙엽, 그것은 우리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고 우리를 사색의 길로 인도 한다.

요즘은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목가적인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차 한 잔으로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것이 가을이 주는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이 시간만은 나만의 시간이다. 그러나 나만의 시간은 짧기만 하다. 가족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삶의 현장을 다시 찾아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틈틈이 여유를 부려 보고 싶다. 차 한 잔의 사색이 삶의 행복이어서다.

작가 프로필

-시인 겸 수필가, 칼럼리스트, 서예가

-대한언론인회 부회장(현)

-계간 한반도문학 주간

-서울신문 논설위원(전)

-시집:사랑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삼강마중물 외

-수필집:들꽃 피는 마을, 당신의 목자는 누구십니까?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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