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모범택시’와 메두사
드라마 ‘모범택시’와 메두사
  • 안산뉴스
  • 승인 2021.04.20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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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석 안산시독서동아리네트워크 회장

모 방송사의 드라마 ‘모범택시’를 재미있게 시청하고 있다. 이 드라마는 범죄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권력자란 신분 혹은 법의 허점 때문에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적 복수를 가한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그들의 행위는 나름 정의의 외피를 입고 있으며 또한 누군가는 그들의 행위로 인해 행복한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적 복수를 행하는 그들의 행위는 실은 해결되지 못한 분노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퀴블러-로스는 사람이 죽음을 선고받고 이를 받아들이기까지 부인, 분노, 타협, 비통, 수용이라는 5단계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주장했다. 즉, 한 사람이 죽음의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처음에는 그 상황에 대해 부정을 하게 되고, 이어 분노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 ‘한 번만 살려주시면~’이라며 타협의 과정에 접어들며 비통해 하다가 결국에는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중 일부는 이 단계 가운데 어느 한 단계에 멈춘 후 고착화 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한 대표적 사례를 심리학자 이동연은 ‘메두사’를 들어 설명한다. 메두사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두 번째 ‘분노’의 단계에서 더 나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메두사는 본래 아테나 여신을 섬기는 긴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사제였다. 그런데 어느 날 포세이돈에 의해 겁탈을 당하게 된다. 포세이돈은 아테나에게 밀려 폴리스 아테네의 주신 자리를 뺏긴 적이 있었다. 그래서 포세이돈은 여신 아테나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는데 이를 메두사를, 그것도 아테나를 섬기는 신전에서 겁탈하는 방식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아테나는 메두사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뱀으로 바꾸어버리는 것으로 자신이 당한 모욕을 갚아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정작 메두사는 피해자일 뿐이었다. 겁탈당한 것도 억울한데 거기에 용모마저 흉악하게 변해버린 메두사가 자신의 처지에 대해 극심한 분노를 품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메두사를 본 사람은 돌이 되어 버리고 마는데 이는 메두사가 뿜어내는 분노에 잠식당한 사람들에 대한 메타포인 것이다.

우리도 어떤 회의나 모임에서 누군가 분노를 표출할 경우 분위기가 싸하게 얼어붙거나 돌처럼 굳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던가. 일반적으로 ‘분노’의 단계에서는 돌파구를 찾으려는 ‘협상’의 단계로 나가야만 현실조정력과 면역력이 생기는 법인데 메두사는 분노의 단계에 멈춰버리고 말아 그 어느 괴물보다도 무서운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이처럼 ‘분노’의 단계에 머물게 되면 무엇보다 자신이 먼저 망가지고 만다. 그것의 대표적인 양상이 타인과의 교감 단절이다. 분노에 찬 메두사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돌로 변해버린다. 돌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며 피도 흐르지 않고 따스한 온기도 느낄 수 없는 존재이다. 또한 대화도 할 수 없기에 어떠한 교류를 할 수가 없다. 이는 그를 더욱 고립되게 만들고, 고립된 상황은 다시 그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결과로 환원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결국 메두사는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어 홀로 살다가 종래 페르세우스에게 목이 잘리고 만다.

우리 사회는 무엇보다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 심한 갈등과 대립의 면모를 보인다. 진보와 보수, 여야의 지지자들은 서로에 대해 날선 언어로 증오를 내뱉는다. 옳은 것은 나뿐이며 너는 단지 짓밟혀야할 대상일 뿐 너의 의견은 들을 가치도 없다고 여긴다.

따라서 여기에는 합리적인 토론의 장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에 대한 주장과 이에 대한 치열한 논쟁은 반드시 필요하며 또한 권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논쟁은 분노가 아닌 타협의 단계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각자의 주장은 정당성과 함께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자신이 내뱉는 언어에 대해 분노와 타협 사이에서의 줄다리기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자.’ 드라마 ‘모범택시’ 주인공의 사무실에 걸려있는 액자의 성경 구절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악에게 진 사람들이다. 적어도 그들이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이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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