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계몽가 최용신
농촌계몽가 최용신
  • 안산뉴스
  • 승인 2019.01.1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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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순 옥

역사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역사가 되는, 안산문화유산 활용전문 교육과정이 2018년 11월과 12월 두 달에 걸쳐 있었다. 학술포럼에서 만난 인물은 안산을 대표하는 조선시대 실학자 성호 이익선생과 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 선생이다.

두 인물의 학술대회는 전문 과정만큼이나 학자들의 논쟁이 뜨겁게 벌어지는 고차원의 대회였다. 학자들이 논문을 발표하면 그 논문에 대해 정확한 증명이나 사실 등을 묻고 이의를 제기하는 열띤 토론의 장이다. 하루에 다섯 시간씩 이틀을 역사 삼매경에 빠져 그 시대의 지역과 배경, 함께 한 사람들, 인물들의 생애를 집요하게 탐구한다. 전문교육을 받지 못한 나에게는 매우 어렵고 생소했다. 대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탐방체험도 하면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 학술대회를 통해 최용신 선생의 주변인물에 대한 내용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재조일본인 오야마고유교는 1920년 수원군 반월면에 들어와 농민들 생계해결을 위해 새로운 농법을 도입하고 축산업도 시작했다. 일본 가고시마현에서 고구마 종자도 들여와 재배하여 식량문제를 해결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그를 농민들은 일명 ‘고구마 선생’이라 칭송했다.

오야마는 샘골학원에서도 활동했다. 최용신 선생이 죽자 오야마는 샘골학원을 도맡아 변화시키려 했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농정정책에 앞장선 자로서, 이중성을 가진 일본인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가난에 허덕이는 농민들에게 굶주림을 해결해 준 장본인이니 고마운 일이 아닐까,

최용신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일찍이 개신교를 믿는 부유한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근대교육과정을 수료한 신여성이다. 몸은 여성이지만 남녀를 잘 아우르는 강직한 성격이다. 전유근 목사의 권유로 협성신학을 다녔고, 이때부터 궁핍한 현실을 체험하는 농촌계몽운동은 시작되었다.

근대교육을 받은 훌륭한 젊은이가 출세에 급급해 하지 않고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개인의 욕심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투철한 애국정신은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며,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우리 곁에 살아 있다는 증명이다.

1920~1930년대에 농촌계몽운동은 언론사, 교육기관, 종교단체, 등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때 최용신도 협성신학대학 재학 중 학생대표로 반월면 천곡 농촌지도원으로 파견되었다. 밀러목사는 천곡강습소를 지어 최용신에게 부임한다.

그녀는 샘골학원에서 어린아이, 청년, 부녀자를 위해 2년6개월 동안 문맹퇴치에 힘쓰다가 병까지 얻어 사망한다. 짧은 생을 살았어도 시대에 부응한 훌륭한 그녀, 천수를 누렸더라면 우리나라 농촌과 교육계의 큰 공을 세웠으리라 믿는다.

한 가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최용신은 지독히도 사랑한 한 남자가 있었다. 우여곡절 속에 약혼하고 결혼날짜까지 잡았지만 끝내 결혼을 얼마 앞두고 사망한다. 최용신 약혼자는 처자식한테 자신이 죽거든 최용신 옆에 묻어 달라고 부탁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의 아내는 그 유언을 순순히 들어준다.

거침없는 청춘 26세 최용신은 세상을 등지며 몇 가지 부탁했다. ‘사랑하는 샘골학원을 영원히 경영해 주세요, ‘샘골 형제, 여러 학생들, 어찌 두고 가나, ‘김 군과 우리 두 사람 농촌에 바치자고 약속했는데, 하지 못한 게 아쉽다, ‘어머니한테 먼저 가서 죄송하고,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알리지 말고, 마지막으로 내 유골은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 주세요,

최용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도, 일제도, 아니고, ‘깨어나지 못하고 대대로 이어온 우리의 무지라고’ 했다. 그녀는 오로지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라는 뜻을 가지고 실천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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