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중산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중산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안산뉴스
  • 승인 2022.11.16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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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숙 안산뉴스 논설위원

‘중산층’은 경제적 요소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의식수준, 생활기회, 직업적 지위 등 비경제적인 요소까지 포괄하는 계층적 범주다. 이에 주관적 계층의식에 대해 알아보고자 “당신은 어느 계층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하면 약 70% 정도가 ‘중산층’에 속한다고 답을 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산층’ 귀속 의식에 강하다. 이는 객관적 지표보다 주관적 평가에 더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삶의 질이 급속히 개선되었고 때문에 이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 한편 사회학자들은 인구 계층 구조 중 ‘중산층’이 두터운 다이아몬드 형태가 가장 안정되고 건강한 사회구조라고도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각 국가별 ‘중산층’의 기준은 무엇일까.

사회심리학자 허태균은 그 기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국의 중산층은 부채 없는 30평 아파트에, 월 500만 원 이상 급여를 받고, 2,000cc급 중형차를 몰며, 연 1회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즉 한국인들이 갖는 중산층의 기준은 경제적 수준으로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는 1개 이상 외국어를 할 줄 알며, 직접 즐길 수 있는 스포츠가 한 종목 이상 있어야 하고, 1개 이상의 악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자신만의 색다른 요리 메뉴가 있어야 하고, 사회적 분노에 공감할 줄 알아야하며, 약자를 돕는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프랑스인은 교육, 문화, 생활, 나아가 사회적 참여 수준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영국의 기준은 매사에 페어플레이를 하고,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확실히 갖고 있어야 하며, 독선적 행동을 피하는것과 동시에,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에 대응하면서 불의·불법에 저항해야 한다고 인식한다, 즉 영국인들은 도덕적이며 사회적이고 자존감의 기준을 덕목으로 하고 있다. 미국의 ‘중산층’은 언제나 자신의 주장이 떳떳해야 하고, 사회적 약자는 도움을 주어야 하며, 강자에게는 강해야 하는 동시에 부정, 불법에 저항해야 하고, 비평지를 한 권 정도는 정기구독해야 한다고 믿는다. 즉 미국인들은 이타심을 중시하며 사회적 공정에 비판의식을 갖고 용기 있는 저항을 요구하고 있다.

필자는 위 선진국들의 ‘중산층’ 기준에서 특이한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과 높은 공명심(公明心)을 주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사회적 분노에 공감하고, 강자에 대응하며 동시에 불의와 불법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변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강자에게 한없이 약하고 약자는 끝없이 짓누르는 그런 비겁한 사람이 아니라, 불의와 직면할 때 개인적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용기 있게 저항해야 진정 ‘중산층’이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럼 왜 선진국은 이러한 덕목을 ‘중산층’의 기준으로 갖게 되었을까. 이는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와 사회발전의 근원이 되어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 이러한 비판의식과 그에 따른 저항력은 시대마다 변화와 발전을 이끌었고, 이것이 선진국의 지위를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왜냐하면 다수로 구성된 ‘중산층’의 문제 제기가 공론으로 형성돼 혁신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국은 어떠한가. 우리 사회는 아직 사춘기적 진통을 겪고 있다고 허태균은 말한다. 해방 이후 급변하는 양적변화에 적응했고, 이제는 질적변화를 견뎌내야 할 차례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의 ‘중산층’ 기준이 정량적인 경제에만 머물러 있게 된 것인데, 이제는 선진국과 같이 사회적 의식의 성숙으로 전환해야 할 때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회적 불의를 보고 용기 있게 나서길 꺼려하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나선들 문제가 개선될지도 의문이고, 오히려 파편이 돌아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아예 못본척 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경우는 잘잘못에 대한 비판은 커녕 기회만 있다면 불의한 권력이라도 사리사욕을 챙기는 선택을 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선택의 반복이 마침내 일본의 침략까지 이르게 된 것 아닌가. 허태균은 한국이 무비판적이고 불의에 항거하지 못하는 문제를 사회심리학적으로 볼 때, 한국은 직선적 사고를 지양하고 복합유연성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직선적 사고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이라면, 복합유연성은 순환적이서 중간지점을 선택하려는 성향이 짙다는 것이다. 즉 잘못된 것에 저항하지 않고 중간지점에서 애매한 포지션이, 오히려 불의와 공생하며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데 동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식의 반복은 개선의 순간을 놓치게 되므로 결국 실패가 기다릴 뿐이다. 선진국의 ‘중산층’ 기준처럼 불의와 불법에 항거하는 공명심은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를 스스로 공정하게 만들어 가는 주최가 된다는데 의의가 있다. 진정 선진적 ‘중산층’이 되고자 한다면 용기 있게 아닌 것은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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