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온도
관계의 온도
  • 안산뉴스
  • 승인 2026.09.09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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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란 시인

성큼 다가온 가을이 반갑다.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 책읽기 좋은 날씨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기회가 거의 없는 필자는 대중교통이 낯설다. 특히, 갈아타야 하는 전철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날, 뾰족한 대안을 찾지 못해 상록수역에서 지하철을 탔고 치열한 자리다툼은 눈치 게임처럼 찰나에 끝났다. 금정역에서 운이 좋게 빈자리에 앉고 나서야 지하철 안에 사람들이 보였다. 앉은 사람도 서 있는 사람도 한결 같이 목을 반쯤 숙인 자세로 휴대폰을 보고 있다. 목적지가 한 참 남은 필자도 약속이나 한 듯 휴대전화 속 긴긴밤 동화책을 펼쳐 들고 같은 자세를 취했다.

루리 작가의 긴긴밤은 코끼리들 사이에서 자란 코뿔소 노든 이야기이다. 코끼리 고아원에서 성장한 흰바위코뿔소 노든과 버려진 알에서 깨어난 펭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성장동화이다. 자아를 향한 이별과 고독을 통해 내적 성장을 하고 우정과 희망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동화속에서 코뿔소 노든과 펭귄은 서로를 이용하지 않는다.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서도 함께여서 위로가 되고, 상실과 고통을 겪더라도 함께 걷는 시간이 서로를 지켜주고 끝까지 버티는 힘이 되어 준다. 긴긴밤은 서로 다른 동물들이 상처를 안고 긴 여정을 함께 하는 과정을 통해 사람도 동물도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긴긴밤은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남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서로 다른 존재들이 상처를 보듬고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희망, 연대, 공감, 삶의 용기를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느껴진다. 서로 짐이 되어도 곁을 지키고 상처를 안아주고 함께 나누고 이겨내는 동물을 등장시킨 동화지만 사람들 이야기로 독자들에게 절망의 밤도 함께라면 끝내 새벽을 맞이 할 수 있다는 묵직한 질문을 던져 긴 밤을 건너며 살아남는 것이 가장 큰 지혜임을 보여주는 희망적인 메시지이다. 또한 끝까지 고난을 함께 극복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현대사회의 우리에게 공감의 힘과 관계의 회복, 사랑의 연속성으로 희망을 이어주며 깊은 울림을 준다.

하지만 동화와 달리 인간관계는 그 반대로 흘러갈 때가 있다. 대문 밖을 나서면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된다. 사람을 만나는 기준이 도움이 되고 쓸모가 있는지가 우선시 되기도 한다. 성과와 등수로 비교되고, 경쟁력과 사회적 위치가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된다. 위로받고 싶은 공간에서조차 또 하나의 경쟁이 되는 사회가 더한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더 두려운 것은 이런 일련의 일들이 비정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잘 참고 견디면 답답하고 미련한 사람 취급을 받는 반면 불편하면 관계를 쉽게 정리하는 것을 현명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인내하는 것은 손해며 책임지려는 행동은 때로 판단을 못하는 아둔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인간관계마저 시장의 논리로 결정되는 세상에서 힘듦을 나누고, 상처를 보듬는 긴긴밤 동화속 동물의 모습을 통해 정작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동화가 들여주는 메시지는 혼자 버티는 것이 아닌 함께 나누고 극복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책임이다. 긴긴밤이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이지만 어른들에게도 반성과 울림을 주는 이유이다.

문명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경고문처럼 들리는 작가의 메시지는 확고해 보인다. 관계는 우리의 체온과 닮았다. 너무 차가우면 얼어붙고 너무 뜨거우면 데인다. 휴대전화 배터리는 닳으면 충전하고, 가전제품은 고장이 나면 수리하면 된다. 하지만 사람 관계는 어떤가. 조금 불편하면 멀어지고, 생각이 다르면 정리한다. 필자도 언제부턴가 서로 타협하고 조율하는 소모적인 과정보다 생략하는 쪽이 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관계의 온도는 체온계로 잴 수 없다. 위기의 순간마다 질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용기를 내어보자. 동화 속 “무서워도 계속 가야 해. 가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는 작가가 독자들에게 보내는 연대와 위로의 메시지로 큰 힘이 되어 준다. 관계의 온도가 세상을 바로 바꾸지는 못한다. 하지만 가까운 한 사람의 긴긴밤을 함께 건너는 동지가 되어보면 어떨까. 그렇다면 우리의 긴긴밤도 따뜻하고 조금은 짧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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